Book review 5. 나의 투쟁 1 |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자화상

in #booksteem6 years ago (edited)

나의투쟁.jpg

'일기장'이라 쓰고 '소설'이라 읽는다
평범하게 살기 싫었을 뿐인데
너도 나도
삶이 소설이 되어 소설을 살고 있다
오늘은 내가 비련의 주인공도 해보고
내일은 승승장구하는 승리자도 해보고
그렇게 소설을 살고 있다

.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군대에 가기 전까지 20여 권의 일기장을 썼습니다. 글쓰기가 나를 성장시켰고 일기 쓰기가 곧 나였습니다. 처음엔 한 달에 한 번이나 쓰던 일기가 스무 살이 가까워지며 일기 쓰는 간격이 줄었고, 대학을 포기하고 식당에서 일할 땐 거의 매일 써내려갔습니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일기라도 쓰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서른 즈음 일기장을 하나 꺼내 읽어봤습니다.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하루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기장에 나온 이름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하루와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내가 기억력이 아무리 나쁘다지만 '매우 기분 나쁜 하루'라고 써놓은 하루가 기억나지 않음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기장을 모조리 처분했습니다. 마치 남의 하루를 훔쳐보는 것 같았거든요.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블로그를 만들어 끄적거리기도 하고, PDA를 사서 끄적거리기도 했습니다. 그저 끄적거림으로 그칠 뿐 그 후로 제대로 일기를 써보질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일기를 꾸준히 쓸 걸 그랬습니다. 일기장도 버리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럼 이 소설 저자처럼 6권짜리 소설책 하나는 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이 책 <나의 투쟁>은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모두 여섯 권의 시리즈이며, 국내엔 1~3권까지만 번역이 됐습니다. 각 시리즈별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며, 1권은 작가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그리고 작가 데뷔 이야기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일기장을 베낀 것에 가까울 정도로 상세하며 딱히 주제가 없습니다. 사건의 흐름도 없고, 사건의 이어짐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일기장을 베낀 것 같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썼다고 하기엔 너무 상세해서 일기장을 베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대화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흐름상 필요하지도 않은 부분을 수십 페이지식 써놓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유럽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깁니다. 의도치 않게 최근 유럽 소설들은 하나같이 매우 깁니다. 너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소설의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도 아주아주 길게 수 십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더군요. 유럽 소설의 특징이라면 '두껍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읽기 힘들거나 재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한국소설이나 영미소설, 일본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글자를 읽는 맛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저녁에 할 일이 없어서 책 읽기를 즐기는 게 아닐까. 그래서 빨리 해치워버리지 못하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것일지도.'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최저임금이 너무 비싸서 저녁 6~7시만 되면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회사원들도 저녁 5시면 대부분 퇴근하며 저녁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합니다.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그 담엔 책 읽기? 그래서 두꺼운 건 아닐지요.

저는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 읽기를 좋아합니다. 소설가가 꿈이기에 소설가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예술 하는 사람은 보통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크나우스고르(아, 이름 어렵다. ㅠ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학교 가기 싫어했고, 학창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즐겼으며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서운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무섭고 공포스러웠으며 아버지 앞에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못난 아들이었죠. 그래서였는지 반항적인 아이로 자랍니다. (아, 나는 너무 범생이로 자라서 소설가가 못 됐나? 하하하) 그는 무정부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으며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자랍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동경했습니다. 한마디로 문제아. 그런 그가 소설을 씁니다. 그는 특히 아버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소재는 삶에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소재였기에 문학이라는 틀 안에 가두기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학엔 문체, 구성, 플롯, 주제 등을 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아버지 얘기를 이런 형식의 소설로 쓴 것일지도요.) 그는 일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오직 소설만 씁니다. 주린 배를 참아가며 씁니다. 글을 씀으로 세상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글을 씀으로 좌절합니다. 소설만 쓰느라 돈이 떨어져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을 돈을 생각합니다. 아, 그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 소설(?)의 주제는 아마도 도입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죽음으로 시작하는 괴상한 도입부. 그는 도입부에서 "심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힘이 다할 때까지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다 멈추어버리면 되니까."라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엔 심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근원, 생명의 시작. 아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병원에서 들었던 심장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콩알만 한 생명체에 심장이 있었고, 심장은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떠한 장기도 없고 얼굴도 손도 발도 없는 생명체는 심장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습니다. 쿵닥쿵닥쿵닥쿵닥. 저는 지금도 아들의 심장소리 듣기를 좋아합니다. 아이가 잠들면 귀를 코에 대고 숨소리 듣기를 좋아합니다. 생명의 시작이 심장이듯 생명의 마지막도 심장인 것도 같습니다. 저자는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 비참한 삶을 살다 간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인지 고뇌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심장이 멈추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죽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남은 자들에게는요.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아직 50도 되기 전에 생을 마쳐야 했던, 나와 너무도 똑같은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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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죽음에 대한 글을 자주 읽습니다. 이러다가 죽는건 아닌지 겁이나네요ㅜ 자전적 소설은 이야기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쉴드를 친다고 할까요? 그래서 가끔 작가들은 자전적인 소설이라 해도 아니라고는 하죠. 재미있습니다 그런걸 보면. 작가도 사람이니까요~ 저도 책리뷰를 주로 씁니다. 자주 소통해요^^

'나는 나중에 80살쯤 되면 자전적소설을 써야지' 했는데, 얼마전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을 읽고는 생각이 바꼈어요. 그래서 천천히 하나씩 써보려고요. 제가 최근 소설을 주로 읽어서 소설리뷰가 많긴 한데, 우리 소통하고 지내요. ^^

글을참 잘쓰시네요
저도 출근할때 아이 숨쉬는 소리
잠든모습 한번보고 출근하는데요
제 아버지도 그러셨겠죠
부모님께 전화한통 드려야겠네요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헛,,, 아직 졸필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원래 애들은 잘 때가 가장 예쁘죠. ^^

저는 국내 번역된 이 작가의 투쟁을 다 읽었어요.
2권에서는 육아 전쟁이 장난 아니죠.
그 나라에서 대단히 인기 있는 작가라는데
아마도... 번역으로는 그들 언어의 맛을 다
못살리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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