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최초의 메스티소(mestizo) 마르틴 코르테스
역사: 최초의 메스티소(mestizo) 마르틴 코르테스
1522년, 아스테카인들의 핏빛 저항이 채 가시지 않은 멕시코 땅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마르틴 코르테스(Martín Cortés). 아버지는 아스테카 제국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요, 어머니는 정복전쟁 내내 통역관으로 곁에 붙어 지내던 원주민 여자 말린체(Malinche)였다.
역사에서는 이 아이를 “최초의 메스티소”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면,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지도 어언 20년이나 지난 때였으므로, 유럽태생의 백인 아버지와 원주민 여자 사이에는 수많은 메스티소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상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현대인들은 이 아이를 “최초의 메스티소” 또는 “최초의 멕시코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1522년이면 에르난 코르테스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쿠바에 머물 때, 스페인 여자 카탈리나 수아레스(Catalina Xuárez)와 정략결혼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틴 코르테스는 혼외정사로태어난 사생아였다.
아스테카 제국의 멸망을 그렇게도 바랐던 말린체는 아들 하나만 나아주고 곧 코르테스 곁을 떠나버렸다. 첫째 부인 카탈리나도 마르틴이 태어나던 해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리하여 어머니 없이 자란마르틴 코르테스는 1528년 아버지를 따라서 스페인으로 갔고, 곧 국왕 카를로스의 5세의 시동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1540년 어느 날이었다. 스페인 왕실에서 마르틴 코르테스는 또 하나의 마르틴 코르테스를 만났다. 아버지가 데려온 이복동생이었는데, 나이는 자기보다 10살이나 어리고 피부색도 다르지만 이름만큼은 철자하나 틀리지 않았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정실부인 후아나 데 수니가(Juana de Zúñig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린 마르틴 코르테스 또한 왕실의 시동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아버지 코르테스가 스페인에서 사망(1547)한 이후에 점차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었다. 동생은 아버지로부터 ‘오아하카 후작’이라는 작위와 함께 방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형은 이제부터 동생이 드리운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1563년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후작의 신분으로 마치 왕 같은 환대를 받았고, 외출할 때도 화려한 가마를 이용했으며, 거의 날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었지만 형은 집사처럼 수행원처럼 묵묵히 뒤치다꺼리를 도맡았을 뿐이다.
멕시코 터줏대감으로 자부하던 동생이 스페인에서 파견된 식민관리들에 맞서 반란 음모를 꾸미고 다닐 때도 형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동생은 경제적 이해를 침해하는 식민관리들을 살해하고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음모가 발각되자 동생은 연루자를 밀고하고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형은 고문대에 묶어놓고 심문을 해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사지를 묶어놓은 밧줄이 살점을 파고들고, 뼈마디가 늘어지고, 죽음이 찾아와도 끝내 침묵으로 버텼다. 이때가 1568년이었다.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와 600명의 에스파냐 군인들이 아스텍 문명의 땅에 상륙했다. 아스텍 신화중에서 케찰코아틀이라는 신은 태양력 1500년경에 흰 얼굴의 모습으로 멕시코를 정복하러 온다는신화가 있었다. 아스텍 신화와 에르난 코르테스가 온 년도, 생김새 등 비슷한 점이 많아서 몬테수마 2세는 두려워하다가 신으로 맞아 주기로 했고, 그로 인해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은 쉬워지게 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신전에 있는 피를 닦았고, 십자가를 세우게 하면서 아스텍인들에게 기독교를 믿게 했다. 또한 에스파냐 군인들은 아스텍인들은 전혀 걸린 적 없는 천연두를 퍼트렸는데, 이를 알고 에르난 코르테스는 "금을 나에게 주어야 천연두가 낫는다"라고 거짓말을 퍼트리기도 했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에게 스페인에 왕국을 넘기라고 요구했고, 주민들은 그에 반발해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의 와중에 코르테스의 부하 4명이 사망하고 아스텍과 스페인을 화해시키려던 몬테수마는돌에 맞아 죽었다. 결국 아스텍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공격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아스텍인을 포함해 그 어떤 원주민도 스페인 사람을 신으로믿지 않았으며, 신으로 믿은 부족이 있더라도 금방 깨달은게 보통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들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원주민들의 총에 대한 공포심이 매우 강했으며, 말과 군견, 돼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스텍 문명은 3년 뒤인 1522년 멸망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은 폐허가 되었다. 모든 희생에도불구하고 아스텍 인들이 에스파냐에 패하자 사기가 떨어졌다.
피의 의식
에르난 코르테스는 피의 의식을 목격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신전에 대포를 발사하여 이 의식을다 때려엎은 뒤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력들을 모두 총살시켰다. 사제들과 경호병력들을몰살시킨 코르테스는 피의 의식에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였던 1만명이 넘는 아즈텍인들을 살려내고집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후 아스텍 원주민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시키는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도록 명령했다. 또한 여기서 제물로 예정되어 있다가 코르테스에 의해 구조되었던 사람들 중에 몇몇 여자들과 에르난 코르테스 사이에서 마르틴 코르테스 등의 사생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사실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아즈텍인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역시 신의 명령을 빙자하여 인육을 즐겨먹는 사제들이 주관하는 이 비인간적인 피의 의식에 극심한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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