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영웅 아메드 샤 마수드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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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역사: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영웅 아메드 샤 마수드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게 어찌 '지하드'인가?"

  • 마수드 장군이 탈레반을 비난하며 한 말.

마수드는 9.11테러가 있기 전 이틀전 9.9 빈라덴이 보낸 첩자들의 의해 암살됩니다. 탙레반을 위협하던 최대의 적이였던 북부동맹 사령관을 죽인 빈라덴의 알카이다를 탈레반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쫓아낼수 없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입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1953년 ~ 2001년)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의 선임사령관이다. 2001년에 암살되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페르시아어:احمد شاه مسعود) (1953년 9월 2일~2001년 9월9일)(다른 번역어로 Ahmed, Masood라고도 한다)는 아프가니스탄의 타지크 족으로 카불 대학의 공과대학생에서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을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판지셰르의 사자라는 별칭을 얻은 군사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마수드를 Amer Sahib e Shaheed라고 부르는데 이는 순교한 지휘관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1992년 초 부르하누딘 랍바니 대통령 치하의 아프간 정부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랍바니정부의 붕괴와 탈리반 체제의 대두에 따라, 아프간 구국 이슬람 연합전선(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 일명 북부동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2001년 9월, 마수드는 압둘 라셀 사야프와 그의 공범이라고 알려진 알 카에다 요원에게 암살되었다. 다음해 그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의 명령에 의해 국가적 영웅의 칭호를 얻게 되다.

1953년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판시르 지방 쟝가락이라는 곳의 지역 유지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자 이슬람 원리주의자였기에, 그 자신도 신실한 무슬림으로 자라게 된다. 그가 장성하여 건축가를 목표로 카불대학에 진학했을 당시 아프간 국왕 쟈힐 샤의 무능과 부패은 극에 달해 있었고, 그 자신도 자연스레 대학내의 이슬람협회(카불대학의 신학자들이 결성한 원리주의 단체)의 하부조직인 무슬림 청년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무슬림 청년조직은 이슬람협회 내에서 반정부운동을 주도하던 중심축이었다.

그러던 1973년 친소파에 의한 쿠데타(주모자는 왕의 사촌이자 한때 수상이기도 했던 다우드였다)가 일어나고 왕은 실각하나(당시 외유중), 당연히 친소 군사정권은 국내의 이슬람세력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게 되고 마수드의 조직도 무장저항에 나서지만 경험부족과 준비소홀로 실패, 그 자신도 75년 파키스탄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 후 78년 다시 극좌 맑시스트 아민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 이슬람 자체를 부정하는 정책을 펴자 마수드는 28명의 동지들과 함께 고향인 판시르에 잠입하여 무장 저항활동을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판시르지방에서 '이슬람 자치해방구'를 선언할 정도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그러다 79년 극단적 맑시즘을 추구하던 아민 정권이 도리어 그의 돌출에 위기를 느낀 소련에 의해 제거되고 뒤이어 카르말 정권이 성립되자, 이제 마수드와 그의 동지들의 적은 소련으로 바뀌었다.

소련과의 투쟁 초기, 그가 가진 무력이라곤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00여 정의 구식 소총이 전부였다. 그러나 여타 무장조직들이 무모한 정면승부에 나설 때, 그는 도리어 지방 무장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이 은거한 판시르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을 살려 철저한 힛트 앤드 런 전술을 구사하게 된다. (소련에서 아프간으로 통하는 단 두곳의 육로가 그의 세력권이었고 아프간 주둔 소련군의 모든것이 그 두 도로를 통해야만 했다.)

80년대 들어 자신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된 소련군은 판시르 지방에 지속적인 소탕작전과 더불어 마수드의 제거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 당시 카불방송이나 소련군 발표에서 마수드의 체포 또는 제거를 보도한 것만 세 차례였다. - 82년 4월, 소련군은 3만의 병력과 200대의 헬기를 동원한 사상 최대규모의 헬리본 작전을 판시르에 실시하였고, 8개월에 걸친 대공세 끝에 소련군은 단 하나의 전술적 성공도 얻지 못한 채 참담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 때 마수드의 무장조직은 도리어 소련군의 콘보이부대에 역습을 가해 자신의 세력 전부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장비를 획득했다....)

83년, 그때까지 여섯 차례에 이르는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판시르에서 전혀 전술 전략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소련군은 대규모 공세를 차차 지양하면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사용한 '데소오트 패트롤' 전술을 사용하고, 아울러 도로 수송량을 줄이고 항공 수송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이듬해에 소련은 TU-16베저 폭격기군에 의한 전략폭격을 처음으로 감행하기에 이르러, 당연히 첫 목표는 마수드의 통솔지역인 판시르였다. 수 차례에 걸친 융단폭격으로 일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5만에 이르는 지역 주민들은 마수드의 인도에 의해 대부분 탈출, 전략적 효과는 전무했다. 이 시점에서 마수드는 소련과의 접경지역인 여섯 개 주(州)를 완전히 장악, 서방의 지원도 받아 지역 내에 교육시설과 의료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85년과 86년에 걸쳐 마수드는 세력의 확장과 사회 기반의 확충에 노력한다. 이 시기에 수많은 이슬람식 초등학교와, 12개의 의원(醫院), 그리고 외과 수술까지도 가능한 세 개의 병원이 세워졌다. 또한 소련과 인접한 10개 주 중 8개 주, 수도 카불을 둘러싼 5개 주 중 3개 주(나머지 2개는 정부군 세력), 그리고 소련으로 통하는 육로 두 곳과 그 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 바그란을 제압한다. (당연히 이 당시 서방에 요란하게 소개된 소련군 수송대에 대한 대규모 승리는 전부 그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86년에서 87년에 걸쳐 소련은 전쟁의 '아프간화'를 추진, 전력을 감축하기 시작했고, 탈레반의 세력권은 마수드와는 거리가 있는 남서부 지역으로, 이란과 파키스탄 접경지였기에 마수드의 북동부 지역에 비하자면 지원창구과 탈출로가 무진장 열려 있는 곳이었다. (마수드의 세력권 중 파키스탄과 맟닿은 곳은 단 한 개 주에 불과했다.)소련은 아프간 정부에 주도권을 넘기기 전 남서부라도 장악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 지역의 소탕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 때 미제 스팅거도 함께 각광받기 시작하였음) 그리고 마수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을 역시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라 비난하였다.

마침내 1988년 소련이 철군을 발표하고 '북부동맹'도 소련군에 대한 공세를 늦추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정부군과의 각축이 본격화 되고 마수드 자신은 서방에 민간차원의 지원을 호소하지만, 아랍권의 수장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서 서방세계의 왕초 미국도 아프간 출신의 마수드보다는 사우디의 거부이자 자본주의의 미태를 숙지한 '빈 라덴'과 탈레반에 더 무게를 두었던 것이다....

그 당시 무자헤딘은 서로의 입장차이로 내전 상태였고, 그 와중에 세력확장을 위해 아프간 인민들에게 강제적 징세나 약탈, 폭력까지 일삼는 조직까지 생겨나 민심은 무자헤딘에게서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런 가운데 무자헤딘의 해체와 종교적 교조주의를 앞세우고, 아프간 남서부 칸다하르에서 나선 것이 '탈레반'이며 이미 군벌, 아니 산적이나 다름없는 지역 무자헤딘을 차례로 격파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것입니다.

마수드 장군이라는 분도 기본적으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셨지만, 신정국가가 아닌 이슬람화된 [민주 공화국]을 꿈꾸신 분이고, 이 분이 해방군 내에 지은 학교들은 후일 탈레반이 저지를 삽질과 대조적으로 '남녀공학'이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나라를 재건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한다."

이 얼마나 명쾌한 이유인가요?

최근, 미국의 전(前) 안보보좌관이란 양반이 쓴 책에서도, 부시의 대테러 전쟁을 비판하며 제일 아쉽게 묘사한 것이 미국 정부와 마수드 장군과의 연락 부족이었지요.... 그 분이 살아있고, 아니 그에 앞서, 알-카에다의 테러가 경고되던 9.11전에 그와 연락이 되어 탈레반을 축출 할 수만 있었다면, 미국이 이런 전쟁의 수렁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사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자객이 '알 자지라' 방송의 기자로 위장하여 마수드 장군을 폭살시킨 것은, 빈 라덴이 9.11 이후 마수드가 (만약 미국의 지원이라도 받는다면) 자신의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을 알았기에 한 행동으로 추정되지요.

아프가니스탄
월간 다함께 제 6 호 [ 2001 년 11 월 ]

근대적 의미의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남부 파슈툰족 족장들이 아흐마드를 샤(국왕)로 옹립한 1747년에 수립됐다. 그는 칸다하르·헤라트·카불을 통치하면서 비옥한 평야 지대인 페샤와르와 신드, 목초지가 풍부한 카슈미르 계곡에서 획득한 공물을 족장들에게 나눠 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 대가로 족장들은 아흐마드 샤에게 충성을 바치면서도 자기 지역에서는 사실상 독자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런데 인도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남진정책을 추구하던 제정 러시아가 19세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로 충돌했다. 러시아는 옥수스 강 북쪽의 영토를 점령했고, 영국은 ‘듀런드 선’을 그어 파슈툰족 공동체를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제국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영국령 인도 주재 총독 커즌 경은 1898년에 아프가니스탄과 그 인접국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들은 장기판의 졸이나 다름없다. 그 장기판 위에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그렇게 진행된 게임은 세 차례에 걸친 아프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아프간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만 해도 아프간인들에게는 국민적 정체성 같은 것이 없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종족과 언어는 국민 국가라는 고유한 의식을 창출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프간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바로 공통의 종교적 기반, 즉 이슬람이었다. 아프간 전쟁을 치르면서 ‘이교도’의 침입에 맞선 이슬람의 ‘성전’(聖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결국 1905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1919년에 영국에서 독립했다.

냉전

20세기 후반의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했다. 1933년에 왕좌에 오른 무함마드 자이르 샤는 자기 사촌 무함마드 다우드에게 쫓겨나기까지 무려 4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다. 1973년에 무함마드 다우드는 국왕의 외유를 틈타 좌익 파르캄당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화국을 선포한 뒤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파르캄당은 1977년에 역시 좌파인 칼크당과 연합하여 아프간인민민주당(PDPA)을 결성했다.

1978년 이번에는 PDPA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는 무함마드 타라키가 ‘혁명평의회’를 구성하고 독재 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집권당의 두 정파가 분열하고, 정적 숙청과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이 겹치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 때부터 무자헤딘의 저항이 시작됐다. 1979년 초 인접국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에 질겁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마저 소련에 넘어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미국은 비밀리에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79년 9월에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타라키가 암살당하고 아민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정정은 여전히 불안했고 반란이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그 해 12월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제거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을 통치자로 내세웠다. 미국은 ‘이교도’의 침입에 맞서 ‘성전’을 부르짖는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인 ISI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CIA(미국 중앙정보국)는 1980∼85년에 36개 이슬람 국가에서 수천 명의 자원병을 모집하여 전사로 훈련시켰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이 ‘아랍계 아프간인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전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알 카에다 조직에 합류했고 전에 자기들을 후원했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 싸우게 된다. 1980년대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있는 자유의 전사들의 저항은 우리가 이 나라[미국]에서 견지하고 있는 이상, 즉 자유와 독립이라는 이상이 결코 꺾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보여 주는 사례다.”

무자헤딘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무자헤딘은 미국과 그 동맹국으로부터 1백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았다. 1986년에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의 군사 고문을 파견하여 “자유의 전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의회를 설득했다. 무자헤딘은 미국의 양대 정당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공화당 상원의원 오린 해치는 “자유의 전사들”이 “단호함과 두둑한 배짱”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는 무자헤딘을 “아프간 국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CIA와 펜타곤(미국 국방부)은 파키스탄의 이슬람 학교와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기지를 잇는 연결망을 구축하고 무자헤딘을 훈련시켰다. 미국이 무자헤딘에게 제공한 스팅어 미사일은 전황을 소련에 불리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한편, 소련도 무자헤딘을 진압하기 위해 45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최대 11만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조차 무자헤딘의 끈질긴 게릴라전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소련군은 대도시 지역을 장악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 밖의 지역은 거의 통제할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판 베트남’이 됐다. 소련군은 결국 1989년 2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0년 전쟁 동안 자그마치 아프간인 1백만 명이 죽었고, 6백만 명이 해외로 떠났으며, 2백만 명은 국내 난민 신세가 됐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전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두었다. 1989년 3월 이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무기 공급이 재개되면서 곧 끝날 듯하던 내전은 다시 격화됐다.

1992년 3월에 압둘 라시드 도스툼 장군 휘하의 우즈베크계 민병대가 정부를 배반하고 아메드 샤 마수드가 이끄는 타지크계 무자헤딘 게릴라에 합류했다. 이들은 연합해 북부의 요충지인 마자르 이 샤리프를 함락시키고 카불로 진격했다. 드디어 그 해 4월 무자헤딘은 카불을 함락시키고 나지불라 정권을 타도했다. 온건파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랍바니가 새 대통령이 됐고, 굴부딘 헤크마티야르가 총리, 마수드가 국방장관이 됐다. 그러나 무자헤딘 정권도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반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무자헤딘은 미국과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러시아, 이란, 인도, 인접 중앙 아시아의 공화국 등 여러 나라와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제 이들 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자국의 이익에 맞는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이란의 지원을 받던 마수드가 가장 먼저 카불에 입성하여 파슈툰 족의 지지를 받고 있던 헤크마티야르의 카불 진입을 불허했다. 그러자 헤크마티야르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카불을 폭격하여 폐허로 만들고 1주일 동안 2만 5천 명을 죽였다. 냉전기에 소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위해서 막대한 무기와 자금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했던 미국은 정작 그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사회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경제 지원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탈레반

1994년이 되자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탈레반이 떠올랐다.

탈레반은 이전에 파키스탄 내 아프간 난민촌에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고 훈련시켰던 바로 그 이슬람 학교(‘마드라사스’)에서 30명의 학생으로 출발했다. 파키스탄의 ISI는 미국의 무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을 지원받아 탈레반을 양성했다. 또, 억압적이기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서 지극히 편협하고 금욕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의 한 종파인 와하비즘을 수입하여 가르쳤다.

탈레반은 부정부패 타파, 내전 세력의 무장 해제, 약탈과 파괴의 중단,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순수한 이슬람 정부 수립을 내걸고 지지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끊임없는 전쟁의 참화와 절망 속에 허덕이던 아프간 민중은 탈레반을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처럼 보였고, 수천 명의 청년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탈레반은 불과 2년여 만에 5만 명의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고, 드디어 1996년 9월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다. 옛 무자헤딘 잔존파들, 즉 타지크계의 마수드파, 우즈베크계의 도스툼파, 시아파 하자라 족의 카림 칼릴리파 등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쫓겨나 반탈레반 투쟁을 계속했다. 이란, 러시아, 인도가 이들 북부동맹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주었다.

이슬람 세계의 맹주 자리를 놓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다투고 있던 시아파 이슬람 국가인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과 앙숙이었다. 러시아는 탈레반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래 적대 관계였던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탈레반과 당연히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이유들

  •    다양한 민족
    

o 북부동맹의 사령관이던 마수드는 타지크족 출신입니다. 아프카니스탄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합니다. 이란인 혈통이며 국경도 이란, 구소련과 맞다 있습니다.

o 탈레반은 파슈툰족으로 전체인구의 34.6%며 파키스탄에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레반을 소탕하려면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도 문제가 됩니다.

§ 탈레반의 중심지는 칸다하라입니다. 영화도 있습니다.

  •    강대국의 선택
    

o 구소련은 미국의 영향력을 우려해서 아프가니스탄의 친소정부를 세우고 침법을 했습다다. 그렇지만 실패를 하고 소련이 해체되는 큰 이유를 제공합니다.

o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고 싶었고 성공을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몇백억씩 도움을 주었지만 전쟁 후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 소련과 전쟁 중 직접으로 관여하기 싫어 파키스탄을 통하여 전쟁에 관여하는데 이때 파슈튠족이 성장을 하고 그 세력은 탈레반세력이 됩니다.

§ 미국은 이란과 관계가 있는 북부동맹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    결국은
    

o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수니파와 시아파)가 합심을 해야하는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강대국과 이웃나라들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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