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이 실생활에 사용되기 까지..

in #kr6 years ago

어제 유시민씨가 참여하는 암호화폐 토론회를 보면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실생활에 상용되기 까지 일반적 사람들이 얼마나 현재를 기준으로

새로운 기술의 효용가치를 판단하는지 복사기의 사례를 살펴볼까 합니다.


뉴욕에 있는 말로리(P.R. Mallory & Co.)사의 특허부에 근무하던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은 특허 관련 문서를 복사할 때마다, '더 신속하고 선명하게 복사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마침내는 개발을 하였고,

이 기술을 IBM, GE, Kodak, RCA, 레밍턴 등과 같은 대기업에 판매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칼슨이 기술의 판매를 제의한 24개의 기업이나 기관 중 바텔 메모리얼 연구소만이 그 기술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이 발명기술에 의해 실현될 장래의 이익을 공유한다는 조건으로 후속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제록스사의 전신은 할로이드(Haloid)라는 소규모 인화지 제조업체였다. 1906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 중 군대가 정찰사진을 사용하면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인화지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축소된 시장에서 할로이드 사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만 하였다.

1945년 창업자의 손자인 조셉 윌슨(Joseph Wilson)이 이 회사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명문 로체스터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윌슨은 할로이드와 같은 자그마한 회사에 근무할 마음이 별로 없었으나, 당시 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많은 일과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고 그를 설득했었다. 윌슨은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전적으로 인화지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뭔가 새로운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새로운 종류의 인화지나 지진기록용 제품이 신규 사업종목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 어떤 것도 선뜻 할로이드의 위기를 타개할 만한 잠재력을 갖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제록스사의 전신은 할로이드(Haloid)라는 소규모 인화지 제조업체였다. 1906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 중 군대가 정찰사진을 사용하면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인화지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축소된 시장에서 할로이드 사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만 하였다.
이 회사의 연구개발 부서장이던 존 데소어는 유망한 신제품을 물색하기 위해 수백 권의 기술관련 잡지들을 물색하던 중, 코닥사의 Monthly Abstract Bulletin 에서 바텔 연구소가 연구 중이던 칼슨의 전기사진술에 관한 논문요약본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직 기초단계에 불과하였지만, 윌슨은 매우 큰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1946년 할로이드는 바텔 연구소에 매년 2만 5천 달러의 연구비를 지급하고, 또한 장차 전기사진술로 인해 생기는 수입의 8%를 내 놓겠다는 조건으로 칼슨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사들였다.

1947년부터 1960년 사이에 할로이드 사는 제로그래피 연구에 7,5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것은 이 회사 영업수익의 2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연구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간부들의 집까지도 모두 저당 잡혔다. 사활을 건 10여년의 연구결과 오늘날과 같은 건식 복사기인 914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다. '914'라는 숫자는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9인치, 14인치까지 복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었다. 914모델이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할로이드 사와 그에 투자한 많은 사람들이 모두 파산하기 때문에, 윌슨은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생산에 앞서 IBM에 합작투자를 제의하였다.

IBM은 이름있는 경영자문회사인 아더디리틀(ADL)에다가 할로이드 사가 개발한 건식 복사기 시장의 전망에 대한 자문을 의뢰하였다. ADL은 일부 사무실에서 복사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그 수요가 기껏해야 월 5천대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또한 914 복사기의 큰 부피와 높은 가격이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지적하였다. 914 복사기가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전망 때문에 IBM과의 합작건은 무산되었다.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IBM의 회장이 된 토마스 왓슨 2세는 "아버지가 가장 후회한 결정 중 하나는 건식 복사기의 초기 단계에서 합작에 참여할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1959년 9월 16일 드디어 최초의 현대식 복사기인 제록스 914 모델이 출시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새로운 산업의 태동을 의미하였다. 미국에서 복사되는 양이 1950년대 중반 2,000만 장에서 1964년에는 5억만 장, 1966에는 140억만 장으로 폭증하였다. 1985년에 전세계에서 복사된 양은 무려 7천억 장이나 되었으며 '제록스'라는 회사명은 곧 '복사'한다는 뜻으로 자리잡았다. 싸고 깨끗한 복사는 정보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원본보다는 복사본이 이중, 삼중으로 복사되었기 때문에 이는 가히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동구권이 몰락하기 전의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복사기의 사용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사실을 상기해 보라. 914 모델의 성공으로 1960년부터 1970년 사이에 제록스의 주가는 무려 66배가 뛰어 올랐으며, 이로 인한 '제록스 백만장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http://m.cafe.daum.net/kis0901/Jqaa/1643?q=A.B%20Dick%20%EF%BF%BD%EB%93%85%EF%BF%BD%EB%BF%80&

코닥도 비슷하죠..
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관련 기술력과 전문인력이 최고 좋았으나,
디지털카메라 수요를 잘 못 예상했고, 자신들이 판매하는 필름의 수익저하를 우려해서,,
티지털카메라 사업부분은 축소시키는 잘못된 판단을 하였지요..
하지만, 코닥에서 예상했던 수요는 일반적인 카메라 수요만 예측하였지, 지금의 핸드폰, CCTV, 블랙박스 등
상상을 초월하는 수요가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을 간과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결국..코닥의 기술과 인력은 캐논등 일본기업으로 옮겨 갔고,
코닥은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당시.. 회사 선배가 인터넷이 왜 세상을 바꿀수 있는 기술인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했고
어디 사용될 건지 나에게 물었을때..메일과 뉴스 2가지 이외는 답변을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모르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줄것이라 생각은 들었습니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그리고 수많은 코인들이 미래의 가치와 편의성을 위해 나오고 있지만,
단순하게 물건을 살수 있는냐에 초점을 맞추고 거품이 많고 투기가 횡횡한다고 필요 없다는 논리는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금만 상상을 하면 블록체인이 우리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직감할 수있습니다.
인터넷이 정보와 데이터를 전세계를 연결하였다면,
블록체인은 금융과 신뢰, 계약 무수히 많은 시장을 연결할 수 있으므로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음이 인터넷 메일(한메일) 서비스 하나를 선점한 결과..인터넷 산업의 강자로 군림하였고
무선 메신저를 선점한 카카오는 다음까지 합병하면서 우리 일상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어느 코인이 어떻게 발전되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 시킬지 잘은 모르지만,
확신한것은 개인의 만족, 효용가치를 가지는 기술과 코인은 어떻게든 살아 남고
미래생활의 너무 당연한 일부분이 될 것 입니다.

유시민씨가 장난감으로 판단한 블록체인 기술
과연 유시민씨는 그 장난감 기술이 접목되지 않은 미래 생활을 할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꼭..완벽하게 이해해야만 다 아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대충 알아도..유연한 사고와 풍부한 상상력만 있으면,
새로운 기술의 미래가치를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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