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이번에는 왜? ‘박정희 신화’ 깨부순 구미 시민들에게 물었다

in #kr6 years ago

“박정희 기념사업에만 예산 쓰니 지역경제 엉망” 발끈한 시민들

경상북도 구미는 어디에서나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구미 시내 곳곳을 누비는 택시회사 이름도 '새마을' 콜택시이고, 구미역 앞의 큰 재래시장 이름도 '새마을' 구미시장이다. 길거리에 여기저기 나뒹굴던 일수 명함에서도 '새마을'이란 이름이 적혀있을 정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고, 매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신제가 열리는 곳. 여전히 구미는 '박정희 신화'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어느 선거보다도 매서운 민심을 확인한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구미시민들도 '대이변'을 만들어냈다. 지방선거가 시작된 이래 민주당 계열에게 기초의원 한 석도 쉽사리 내주지 않았던 곳에서 민주당 소속 시장이 당선된 것이다. 구미시민들이 '민주당 시장'을 택한 것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처음이다. 구미시 곳곳에 걸린 당선 인사 현수막 중 파란 현수막이 유독 돋보였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구미 시민들이 변화를 택한 이유
"구미 경제 엉망인데 박정희 기념사업에만 몰두?"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 즈음이 지난 21일, 구미 시내 곳곳에서 만난 시민들은 자신이 왜 자유한국당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답을 했다. 매년 수백, 수천억원의 예산으로 논란이 됐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대한 분노는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보수'라고 규정한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미역에서 만난 이모씨(65세·남성)는 자유한국당 이야기가 나오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내가 65살인데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 같은 정치인은 처음 봤다. 말도 함부로 하고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서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라며 "내 나이대 사람들은 모여서 이번엔 민주당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만 했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구미시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를 질문하자 이씨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그는 "지금 구미 경제가 말이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장 활발한 도시였는데 지금은 어쩌다 이렇게 죽어버렸나"라며 "전부 예산을 박정희 기념사업에만 쓰니까 엉망이 된 거 아니냐. 공단도 텅 비어있고. 이미 죽은 사람한테 왜 억지로 돈을 쓰는지"라고 혀를 찼다.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대기업 공단들이 즐비해 한때는 경북 최대의 산업도시로 꼽힌 구미였지만 지금은 많은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하거나 폐업했다. 고꾸라진 지역경제에 대한 책임은 구미의 집권당이었던 자유한국당으로 향했다. 구미시민들의 한숨은 깊어져 가는데 시장들은 구미의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박정희'만 외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반신반인"이라고 칭송하던 게 바로 직전 구미시장(남유진)이었다.

구미시 봉곡동에 거주하는 주모씨(46세·여성)는 "예전에는 나도 무조건 자유한국당이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자신을 "박정희 기념공원에도 자주 놀러 간 사람"이라고 소개한 뒤 "그런데 박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진실을 알게 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왜 그런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에 우리의 세금을 낭비해야 하느냐"라고 되물었다.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 "자존심 상한다"라는 등의 솔직한 감정도 터져 나왔다.

이모씨(31세·여성)는 "괜히 구미시민이라는 이유로 욕을 먹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곳은 도지사든, 시장이든, 구의원이든 계속 똑같은 당만 당선됐기 때문에 구미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며 "(같은 당만 당선이 되니) 도시 정비나 다른 곳에 써야 할 시 예산을 엉뚱하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썼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미시민들을 '박정희' 이야기만 하면 다 뽑아주는 바보로 아는 것 아니냐"라고 분노를 표출했다.

구미 지역 지배해 온 '박정희 신화'
시민들이 투표로 직접 막내리다

물론 여전히 '구미는 자유한국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시민도 있었다. 이들은 예상치 못한 선거 결과에 대해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감도 동시에 엿보였다.

"나는 (민주당 말고) 다른 당 찍었다"는 추모씨(64세·남)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뜻밖이라는 말 밖에 안 나온다"고 말했다.

잠시 한숨을 내쉰 추씨는 "아무래도 구미에 젊은 사람도 많고, 객지 사람도 많다. 공단도 있으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노조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민주당을 찍어준 게 아니겠느냐"라면서도 "사실 결과 보고 처음에는 많이 실망도 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 사람이니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고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이가 60도 넘었고, 성향 자체가 보수이기 때문에 2번을 찍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잘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라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서 북미정상회담까지 잘 됐고, 성과도 있으니 나도 마음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내 소신 때문에 보수당 후보를 찍었지만, 구미도 변화해야 한다는 건 인정한다"고 덧붙였다.

구미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았다. 이번 선거 결과는 시민들이 직접 '박정희 신화'에 대한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미 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인(민주당)은 신화가 떠난 자리에 시민을 채워 넣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수위원회의 명칭을 '시민준비위원회'로 명명한 이유도 시민들의 참여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다.

구미참여연대도 장 당선인의 당선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새마을운동을 도시의 상징처럼 여기던 권력이 교체됐다. 수백억이 드는 박정희 우상화 사업이 추진되는 것을 지켜본 시민들이 자유한국당을 응징한 것"이라며 "20여년 동안 계속된 독점의 사슬을 끊어낸 구미 시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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