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단편소설] 사라진 여자 #2

in #kr3 years ago (edited)

K와 나는 사무실을 나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지만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지만 상가에는 아직 걷어내지 않은 성탄 장식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식당은 한가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모듬 참치회와 소주를 시켰다.

음식과 술이 나올 때까지 10분여가 흘렀다. K는 침묵을 지켰다. 나 역시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야 슬슬 퍼즐 게임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해보게. 그녀를 어떻게 만났나?”
“3년전 겨울이었지.”
“12월 21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그 날이야.”
“자네 이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혼자가 된 뒤 얼마만이었나?”
“그게, 한 2년쯤 뒤였던 것 같아.”
“연애를 하고 싶었나?”
“그러지 않았네. 나는 남녀관계에 신물이 나 있었어. 그러지 않았겠나? 지긋지긋했어.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서로를 착취하는 것. 처음엔 감정적으로 착취하지. 그러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경제 공동체가 되네. 말이야 그렇지 경제적 착취 관계로 질적 변환을 일으키지. 나는 전 처가 결혼 전에 얻었던 사채빚을 대신 갚아줘야 했어. 전 처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지. 뭐 그럴 수야 있을거야. 하지만 한번 돈 문제가 엮이기 시작하면 애정이고 뭐고 싹 다 식어 버려. 결혼이란 건 또 하나의 직장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연애든 결혼이든 일종의 계약이야. 감정을 핑계 삼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만나는 거지. 여하튼 그래서 헤어지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지.”
“그렇게 남녀 관계가 지긋지긋해졌다면 왜 또 연애를 시작한 거지?”
“그게 참 희한한 일이었네. 연애를 하고 말고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어. 그냥 어느날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무기력하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네.”
“무기력하게? 표현이 재미있군. 그럴만큼 그녀가 매력적이었나 보군.”
“매력이란 게 말야.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누가 봐도 아주 매혹적인 여성은 아니었어. 외모도 평범했고. 그런데 만난 첫날 내 감정에 아주 강력한 파동이 치는 게 느껴지더라고. 나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빠져 들었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건 그냥 소나기와도 같은 순간이야. 소나기를 내가 어찌할 수 없지. 내리면 맞는 거야. 그녀는 소나기처럼 찾아왔고, 나는 우산이 없었어. 그래서 맞은 것이지. 아무튼 그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어.”

하기야 그렇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건 화학작용이니까. 각자가 가진 매력 지점이 접점을 이루면 감정적 스파크가 벌어진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 별다른 감정이 없다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커플들도 따지고 보면 첫 눈에 잠재적 사랑의 씨앗을 품게 된 경우다. 다만 그 씨앗이 발화되는 순간을 기다렸을 뿐. 어떤 경우엔 발화하고, 어떤 경우엔 씨앗으로 남은 채 소멸한다.

나는 K가 소주 한 잔을 들이키는 걸 잠깐 지켜보다 물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네가 사귀자고 말했나?”
“그러지 않았네. 그것도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지. 대개 연애 상황이 시작될 때 남자가 먼저 여자에게 제안을 하지 않나? 나는 그 법칙 같지도 않은 법칙이 참 싫었네. 왜 내가 먼저 들이대야 하지? 좋아하는 감정이 서로 비슷하다면, 경우에 따라선 여자가 먼저 제안을 할 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여성들은 먼저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 대시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남자보다 훨씬 커서 그럴거야. 그러니 다만 남자에게 먼저 연애 관계를 제안할 여지를 줄 뿐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밀고 당기는 상황이 아주 싫어. 내가 이혼 뒤에 여자를 아예 만나지 않은 건 아니야.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 우연찮게 어떤 여자를 알게 됐어. 무용을 하는 친구였지. 나는 그 여자가 꽤 마음에 들었네. 목소리도 우아했고, 자태도 아름다웠지.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했어. 나는 에둘러 말하는 성격이 못돼. 나와 데이트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 그럼 연락을 해달라고 말야. 데이트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조금
기다려 달라는 거야. 나는 만날 생각이 있다면 날을 정해 알려달라고 했어. 그런데 그 여자는 한 달이 넘도록 날을 알려주지 않았어. 어느날은 술에 취해 새벽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어. 자기로선 엄청나게 용기를 냈다고 말하더라고. 횡설수설하더니 전화를 끊더군. 언제 보자, 하는 얘기도 없이 말이야.”
“그 여자는 아마 자네가 날을 정해주기를 바랐던 거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여자가 내게 자신을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네가 더 적극적으로 나와주기를 바랐을 거야.”
“난 정말이지 그런 게 싫어.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거지? 나는 여자들이 신데렐라처럼 백마 타고 온 왕자가 나타나 구두를 신겨주기를 기다리는 그 습성이 마음에 안들어. 몇월 며칠에 보자. 그 말 하는 게 그리 힘든건가? 아마 그런 게 싫어서 내가 연애 불구가 된 건지도 모르지.”
“연애란 게 그렇지. 처음엔 밀고 당기고 끝은 항상 고통스럽다고.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 같은 거 아닐까. 그래도 사람들이 연애를 추구하는 건 당장의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티격태격하더라도 감정적 교류를 하는 게 삶을 견딜만한 효용 가치가 높다는 기대를 품기 때문일 거야.”
내가 말을 하는 동안 K는 다시 소주 한 잔을 스스로 따라 단숨에 비웠다. 연애관에 대해 나와 장황하게 토론하는 쪽보다 화제를 어서 사라진 그녀에게 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이 여자는 달랐어.”

나도 그가 화제를 돌린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재빨리 반응했다.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지?”
“독서 토론 모임 자리에서였어. 내가 지인들과 한달에 한번씩 독서 토론을 하는데 페이스북의 친구가 나오고 싶다고 해서 초대를 했네. 내가 글을 쓰면 ‘좋아요’를 누른 적도 없는 사람이야. 보름 전쯤에 친구 신청을 해왔길래 수락했었지. 그날 내가 모임에 약간 늦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앉아 있더군. 그녀였어.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말이야. 통성명을 하는데 내가 그녀의 눈빛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약간의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 모임 내내 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지. 말솜씨가 대단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약간은 수줍은 표정으로 조근조근 자기 생각을 풀어 놓았어. 그런데 그 말투에 뭔지 모를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런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네.”
“그 모임이 있은 뒤에 두번째로 만날 때까지는 누군가 먼저 제안을 해야 했을텐데, 그녀가 먼저 제안을 하던가?”
“모임이 끝난 뒤에 사람들이 모두 지하철 역으로 갔어.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데 하필 그녀도 버스를 타러 간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정류장까지 500 미터 정도를 함께 걸었어. 그 사이에 일이 벌어졌어.”
“일이란?”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더군. 저한테 반하셨죠? 하고 말이야.”
“야, 대단한 용기군. 여성으로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하기 힘든 말일텐데.”
“적지 않게 당황했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오더군. 하지만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어. 이렇게 들키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졌으니까. 내 생애 이렇게 먼저 속마음을 드러내는 여성은 처음이었어.”
“자네는 그렇다고 답했겠지. 그리고 바로 데이트를 시작했을테고.”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그날 바로 섹스를 했어.”
“혹 원나잇 스탠드, 그러니까 하룻밤 풋사랑 같은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하지만 우리가 그날 서로의 몸을 탐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연애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런 상황이 낯설기도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 속에서 극도의 편안함을 느꼈다네. 정말 행복한 섹스였어. 그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지.”
“특별한 사람이라....사랑했다는 얘기네. 사랑하면 특별해 보이지.”
“말했다시피 나는 연애 불구인 상태였다네. 그 어떤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도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나는 여성들이 남자를 만나는 게 기본적으로 생존 전략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이건 내 전처 때문에 생긴 편견일지도 모르지.”
“자네가 냉소적인 된 건 당연하지. 하지만 남자가 여성을 만나는 것도 생존 전략이야. 알다시피 우리의 유전자는 번식의 본능을 수행하라고 명령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성욕이 있는 게 아니겠나.”
“맞아. 하지만 그 전략이 표면 위로 드러나면 냉소적이 되는거지. 게다가 사람의 사랑이란 게 유효 기간이라는 게 있지 않나. 기껏 길어봤자 2년이면 끝나 버린다고.”
“그런데 그녀와는 3년간 어떻게 한결같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러니 특별하다는 것이지. 그녀는 정말 한결같이 사랑스러웠어. 언제나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네. 아주 작은 농담에도 깔깔깔 웃어주었지. 그녀가 웃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 귀여웠어.”
“자네와 그녀는 경제적으로는 전혀 상호 의존 관계가 아니었나?”
“밥이야 내가 주로 사긴 했지. 하지만 내가 향수나 옷을 선물할 일은 없었어. 그녀가 원하지 않았거든.”
“그녀는 독립심이 강한 타입이었나 보군?”
“응. 한번도 내게 위로를 구하지 않았네. 투정을 부린 적도 없어. 자기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는 여자였지.”
“결혼을 요구하지도 않았겠군.”
“그거야말로 정말 내가 좋아했던 지점이야. 그녀는 비혼주의자였어. 결혼이 경제적 의존 관계 속으로 사랑을 변질시키는 행위라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지. 그렇게 분명한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게 나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네.”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녀는 무슨 일을 했지?”
“그녀는 일을 하지 않았어. 말하자면 백수였지. 그냥 집에 있다고 했어.”
“그런 상황이면 동거라도 할 수 있지 않았나?”
“동거는 그녀가 반대했어. 함께 일상을 공유하면 시시콜콜한 생활을 나눠야 하고, 그 생활이 낭만을 빼앗아간다고 그녀는 말했지. 그건 정말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어.”
“듣고 보니 특별한 여성이군. 대개 여성들은 안정감을 원하지. 사랑하는 사람과 생활을 공유하는 데서도 안정감을 느끼거든.”
“대신 우리는 매일 만났지. 나는 퇴근을 하면 늘 그녀와 저녁을 먹었고, 대개 내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어. 물론 그녀는 10시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 갔네. 그런 나날이 3년동안 이어졌지.”
“같이 자지는 않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아침까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말이야.”
“그녀가 원하지 않았어. 그녀는 늘 10시 전에 집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네.”
“때로는 그게 서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난 오히려 그게 좋았어. 서로가 가진 고유의 시공간을 존중해준다는 기분이 들었어. 누구라도 자기만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지. 게다가 나는 침대에서 혼자 자는 걸 좋아해.”
“그렇다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나?”
“늘 내 차로 바래다 주었지.”
“집에 들어간 적은 있나?”
“없었어. 그녀는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네.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했지.”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K가 왜 그녀의 사라짐에 당혹스러워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해 보이는 커플, 연애 기간 중에 단 한번도 갈등과 다툼이 없었던 두 사람이 헤어질 이유는 없어 보였다. 여자는 왜 K를 떠난 것일까? 나로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가 종적을 감춘 이유를 찾아내야 할 차례다. 그것보다 우선, 그녀가 어디로 간 것인지 알아내는 게 순서다. 행방을 알아야 이유도 밝혀지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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