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신화: 가이우스 쥴리어스 시저(Caius Julius Caesar 100-4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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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 가이우스 쥴리어스 시저(Caius Julius Caesar 100-44BC)

펌 줄리어스 dkimh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광화정에서 제정으로

인간으로서 역사상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저는 그의 엄청난 카리스마로 인해 결국 그가 세운 것이 되버린 로마제국의 탄생과 1000년이 넘는 번영때문에 그가 오늘날까지 회자될 수 있을거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역으로 시저 때문에 로마제국이 그토록 오랫동안 번성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의 핏줄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때부터 황제 계승이 끊겼을 지라도 그의 이름은 모든 로마 황제의 이름에 붙여졌으며 사실 황제라는 뜻으로도 오랜 역사 동안 쓰여왔다. 러시아의 '짜르'라는 황제 명칭이 바로 '시저'에서 온 것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의 강함으로 공화정의 존속에 위태로움을 느낀 자들이 그를 죽였으나,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帝政)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일 뿐이었다.
쿠테타를 일으킨 자들은 그를 죽였음에도 두려움에 모두 도망갔으며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공화정은 그들의 죽임 당함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핏줄이 아니면 황제가 될 수 없었으며 황제의 이름에는 모두 그의 이름이 붙여졌고, 그가 정복한 땅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 제국이 소유한 대부분의 영토였으며, 이렇게 오래 영속한 나라는 역사 이래 없었으며, 2000년 전에 이미 인구 100만을 넘는 도시가 번성하였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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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 강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속주와 로마본토가 갈라진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강은 오늘날도 그리 깊지 않다. 말이 헤엄치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지프형 자동차라면 건널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지류에 불과한 그런 강일뿐이다. 특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강에 한 무리가 모였다. 한 4천여 명 정도, 수장인 듯한 자는 굳어 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무리들을 앞장서서 다리를 건넜다. 무리는 한 개 군단으로 약 4천에서 5천명 정도의 군인들이었다. 강은 로마 본토와 속주의 경계선이었다.

전쟁을 끝낸 모든 사령관들은 본토로 넘어오기 전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는 법에 의해 해제를 해야 함으로 찔끔 찔끔 무장 해제를 한 총사령관은 결국 한 개 군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부 수장인 원로원으로 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것은 소위 ‘최종권고’로서 이는 호민관도 부결시킬 수 없는 비상사태 시 내릴 수 있는 원로원 고유 권한으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게 대권을 부여하며 강을 건널 시 국가반역죄에 처해진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결국 죽음이다.

9년간의 갈리아 전쟁은 로마를 명실 공히 역사상 가장 큰 땅덩어리를 가지는 최강의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하여 로마 시민 및 정부 권력자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권력이 너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존재했다. 어떻게든 법을 앞세워 임페리움(일종의 군 통수 지휘권)을 없애려는 대다수와, 법을 앞세워 끝까지 그것을 갖고 있으려는 한 사람과의 투쟁이었다.

애매한 문구의 법을 담보삼아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온갖 법으로 신경전이 오갔던 그들의 행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 막강해진 사람 하나를 두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한 사람과의 법을 앞세워 겉으로는 매우 신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카이사르는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최종권고로 국가 반역죄로 몰린 카이사르는 도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이미 많은 군단을 반납하다시피 한 그에게 남은 군단이라고는 13군단 단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폼페이우스가 누구인가 ?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에스파니아를 총괄하는 총사령관이 아니었던가 ?

그가 징발할 수 있는 군단은 10개 군단 이상이었고 당장 소집 가능한 군단은 3, 4개 군단으로 수적으로도 3, 4배에 해당된다. 수도 로마를 떠나 도망가는 폼페이우스 앞에 원로원이든 그 누구 권력자든 같이 도망가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4천의 군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카이사르 단 한사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 팽팽하기만 하던 권력의 축이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로 말미암아 깨지는 순간이었다.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한니발처럼 수도 로마로 곧장 진격하지 않고 폼페이우스를 쫓기 위해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다. 모든 지역을 거의 무혈로 정복한 카이사르는 두 달 만에 이태리 반도를 제패하며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에 입성한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폼페이우스는 아군 병사에게 사살되고 내란은 종막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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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전쟁 당시의 갈리아 지역 및 카이사르의 Campaign 경로 그리고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

사실 갈리아 전쟁과 그 직후의 내전에 관한 사료는 모두 카이사르가 남긴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가 갈리아 전쟁과 그 후에 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내전(civil war)에 대한 유일한 사료가 아닌가 싶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전쟁기는 카이사르 흔적의 결정체이다.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한 이 기술은 비록 카이사르 자신의 관점에서 쓴 글이어서 보편성을 띄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그는 결국 승자였기 떄문에 승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패자의 얘기보다 설득력이 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은 카이사르라는 한 인간을 신의 입지에 까지 오르게 하는 막강 권력의 모델로 만들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 패권을 거머쥔 로마의 제국의 탄생을 넘어 제국의 성립과 안정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고 제국의 후기 공화정의 붕괴를 재촉하는 단초가 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갈리아 전쟁이 없었다면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집정관 등 여러 관직을 지낸 평범한 한 귀족으로 남았을 것이리라. 더 나아가 40세가 넘어서야 전쟁터에 뛰어든 그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알렉산더도, 한니발도, 아프리카를 평정한 스키피오도 모두 20대였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그는 갈리아 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출세를 한 것인데 그의 출세는 자신의 영화를 넘어 세계사를 바꾸어 놓는 대반전 기획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다.

세계는 이제 그를 중심으로 돌 준비를 마친 것이다.

갈리아(Gaul)는 오늘날의 프랑스 등 라인강 서쪽의 유럽 땅을 일컫는다. 8년 간에 걸친 갈리아 전쟁으로 라인강 서쪽을 모두 로마제국이 평정하였으며 오늘날의 영국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전쟁 후, 라인강이 하나의 사실상 국경선이 된 것에서 유추하듯이 물론 갈리아의 여러 족과의 끊임없는 전쟁도 있지만 전쟁 내내 게르만 족과의 혈투가 계속된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 중에 동원된 로마군은 총 12만명으로 3백만명에 이르는 적들의 수자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로마군은 3만명 전사에 약 1만명이 부상당했고 상대적은 150만명 전사에 1백만명이 노예화되는 참사였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무려 23군데를 찔려 처참하게 죽음으로 내몰린 시신은 회의장 안에 몇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려하지 않았다. 사지로 내몬 암살자들이 혼비백산하여 앞다투어 빠져나가려는 동료 원로원 의원들 사이로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 변명하는 시간은 24시간이 채 안되었다.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한 위대한 결단하의 그 정의스러운 음모의 거사가 단순 살인 짓에 불과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쿠테타를 했으면 시신을 테베강에 버리고 외쳐야지 ‘로마의 위대한 귀족들이여 ! 공화국을 해하는 독재자를 죽임으로 우리의 공화국은 수호되었다.’ 라고... 물론 하루 정도 그 짓들을 하려고 난리는 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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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하는 카이사르:BC44)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제국을 평정한 카이사르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공화정은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평정한 그는 삼두에서 이두체제 그리고 독보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미 성숙 단계에 이르렀으며 거대한 땅의 통치를 위해서는 온갖 후속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했다.

공화정은 수백년간의 로마의 산물로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나누어가지는 평형추 같은 것으로서 어느 쪽으로 기우는 것을 애시 당초 없도록 법으로 막아 놓았다. 법으로 막아놓은 것은 또 있었다. 가지지 못한 자는 더 가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놓은 것이다. 역으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기득권층은 수백년간 서서히 이루어져 양측의 갈등은 제국 탄생의 미명 아래 표면상으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기득권층이라해도 모두 자신들의 이익 보존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토지 개혁 등을 통하여 무산자들에게 이익을 분배하려는 시도는 기득권층에서 개혁적인 인물들이 나와 끊임없이 시도되고 법의 통과를 앞두고 끊임없이 모두 암살되었다. 가히 더 가지려는 자와 좀 나누자는 자들과의 싸움이었으나 이러한 투쟁은 제국의 확장으로 인한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채워져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피비린내나는 술라의 철권 통치도 오직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하려는 제스추어일 뿐이었다.

귀족 계급의 카이사르는 대다수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었다. 전형적인 평민파로 분류될 수 있는 카이사르는 30대 후반에 들어서야 정계에 입문하여 곧 바로 무산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고자 힘썼으며 평민들의 지지 아래 많은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전쟁에 나가서 공적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제국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함과 동시에 공화정 하에 유일한 통치자로서 술라처럼 지위는 같고 최상위 귀족이나 지지 세력은 정 반대 인 독재자였다.

공화정하의 독재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도 보이고 민주사회처럼 보이는 공화정을 지키려는 대다수의 원로원파(과두세력)의 정의스러운 생각과 행동은 매우 일관성있고 절제된 애국자들의 보편적인 행태로서 제국을 위한 충정심의 발로로서 보이면서 동시에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단이었다. 공화정이야말로 자신들의 이득을 보호해주고 보호해 주는 도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충정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것일 뿐이고...

평민파의 전력에 이제는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막강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 루비콘 강을 건널 때 살기 위해 건넜지만 암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그의 생명은 그로부터 불과 수년 연장되었을 뿐이다. 공화정 지속의 확실한 담보로 카이사르는 필연스럽게 암살당한다. 마치 그의 죽음으로 공화정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누가 알았으랴 ? 기득권을 더 튼튼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공화정이 아니라 제정이었던 것을. 3년여에 결친 내란을 통해 쿠테타를 일으킨 모든 인물들을 죽이고 안토니우스를 자살로 몰아간 옥타비아누스는 명실공히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제국의 새로운 권력자가 됨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른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유지시키되 독립성을 없애버리고 권위의 껍질만을 남겨두었다. 권력의 상실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제정의 출현으로 그들은 더 부자가 되었으며 평민 대비 기득권층의 지위가 더 강화되었다.

공화정을 유지코자 기득권층은 카이사르를 사지로 몰아갔고 더 큰 권력을 위해 공화정을 폐지하였다. 로마제국은 제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 특별해진 기득권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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