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 현대판 토사구팽 -사담 후세인
현대 역사: 현대판 토사구팽 -사담 후세인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월나라 재상이었던 범려가 남긴 말이다.
兎 : 토끼 토
死 : 죽을 사
狗 : 개 구
烹 : 삶을 팽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재상이었던 범려가 남긴 말이었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차지하게 되자 월나라 왕 구천을 더이상 군주로 섬길 수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고 가족을 데리고 월나라를 떠나면서 친구에게 남긴 말이다. 이 말이 전해져 한신이 유방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범려가 남긴 구절을 말했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
티그리트 출생. 카이로대학과 바그다드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에 바트당(黨)에 입당하였다. 1959년 카셈 정권에 의해 대통령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1964년 알레프 정권에 의해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9년 쿠데타에 참가하여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공격(걸프전)으로 1991년 2월 패배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003년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이라크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에 패하여 바그다드 교외로 도주하였지만 미군에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2006년 11월에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그해 12월 3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비천한 태생을 강조하여 일반 민중의 정서에 호소하는 그의 정치 스타을 형성했다. 수니파 하층계급 출신으로, 바그다드에서 160km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출생 연도는 본인 주장은 1937년. 권력적인 보안기관 우두머리 자리와 바트당 사무총장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줄곧 지속된 이라크의 혼란하고 폭력적인 정치 상황, 그리고 서구의 간섭을 경험하면서 능력을 키움.
영국,미국 등 서구이 이라크 개입이야말로 현재의 후세인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 영국은 1차대전 후 강제로 국경선을 긋고 석유 자원을 착취했다. 후세인이 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의 개입이다. 후세인이 집권하기까지 거친 여러 차례의 권력 투쟁에서, 미국은 공산주의 소련의 견제 세력으로서 그를 지지하였다.
이란에 이슬람 혁명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미치광이보다 망니니가 낫다" 며 대량 살상무기를 포함한 전폭적인 군사 지원으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을 부추기며 후세인의 권좌을 탄탄하게 만들어줌.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지금 미국이 군사적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군사 및 산업시설은 과거 미국이 건설했던 것.
1차 걸프전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합병을 선언하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시키면서 내세운 논리는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이었다. 원래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고대부터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고, 두 나라는 같은 아랍 민족이며 이슬람 국가이기에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쿠웨이트의 알사바 왕가는 176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쿠웨이트로 이주하였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을 받아들였다. 이후 석유 생산으로 자립 능력을 갖게 된 알사바는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960년대 초부터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쿠웨이트는 다시 영국의 보호령을 받아들였다. 1963년 압둘라 알사바는 쿠웨이트에서 왕으로 취임하였다.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 국가가 다른 아랍 국가를 침공하여 합병시키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했고, 이로 인해 걸프전이 시작되었다.
1991년 1월 17일 시작된 걸프 전쟁은 최첨단 장비가 동원된 정보전쟁이었다. 걸프전이 시작되자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및 1967년 전쟁 점령 지역으로부터의 철수를 연계시키며 이스라엘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중동 지역 아랍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을 자제시키고 이라크와 아랍 국가들을 분리시키면서 이라크에 대한 고립 작전을 추진하였다.
후세인은 미국이 1967년 6일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땅인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점령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쿠웨이트를 합병한 이라크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미국의 이중정책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랍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걸프전은 정보전쟁이었으며, 자원전쟁이었고, 환경전쟁이었다. 미국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최첨단전자장치를 갖춘 신예무기들을 걸프전에 동원하였으며, 각종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마치 컴퓨터 게임을 즐기듯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동의 원유 매장량은 세계 전체 매장량의 67%를 차지하고 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은 전체 원유 수입의 2.6%를 이라크로부터, 1.0%를 쿠웨이트로부터 수입하였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유들 중에는 석유 쿼터량과 유가문제, 그리고 쿠웨이트의 이라크 원유 불법 채굴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걸프전은 석유자원의 소유권 문제, 생산량 할당 문제, 유가 문제, 국경선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했던 것이다.
걸프전에서 이라크는 미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를 폭파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중동 지역에는 심각한 환경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 문제는 결코 중동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미국이 환경문제를 환경안보로 인식하여 대통령 강령으로 환경안보를 국가안보정책에 포함시킨 것도 걸프전의 결과였다.
걸프전의 발발로 중동 지역은 지금까지의 전통적 대결(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원인이었던 인종, 종교, 국경, 사회 갈등 이외에 아랍인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아랍인 간의 갈등이 연출된 근본 배경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그 원인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던 영토 문제, 종교 문제, 이념적 갈등 문제, 석유자원 배분 문제 등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적 갈등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강대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세계 질서의 변화 과정에서 약소국들은 항상 전쟁과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아랍인들 중 상당수는 좌절과 패배와 상실감, 굴욕감을 느끼고 있다. 아랍인들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원론적으로는 비난하지만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이유에는 미국과 이스라엘 등 강대국에 대한 저항과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내재되어 있다.
이스라엘과의 4차례 전쟁에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아랍인들 중 일부는 후세인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를 제2의 ‘살라훗딘’(십자군 전쟁의 아랍 영웅), 아랍의 대의를 위한 성전의 수행자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구는 그를 살인자, 과대망상 환자로 묘사하였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유로는 중동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공백기를 틈타 지역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는 설과 미국이 파 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들었다는 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고의로 유도했다는 설이 있다. 구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자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자국 중심의 새로운 체제로 개편하려 하였으나, 이라크 등 일부 국가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미국 중심의 체제 구축을 방해했다는 점이 미국의 유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발췌..
8년 전쟁(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남긴 것
뭐 대충 8년 전쟁은 지지부진 끝이 났다. 이란 애들은 남는게 사람이라고 인해전술로 이라크를 공격하고, 이라크는 주변 나라들이 도와주는 자금줄로 좋은 무기 사서는 그걸로 쌈하는 양상이었다...당시 후세인의 <순기능>이란 것이 호메이니옹이 수출하고파 하는 그놈의 <혁명>이란걸 막아주는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정확히 말하자면, <중동지역 왕조국가>의 구원자 였기에 그 지원이란 것이 장난 아니었다...사우디 같은 경우만 봐도 자기가 보증서서 프랑스의 미라지 전투기와 슈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 미사일을 빌려와선 사담에게 건네줬으니 말이다....걸프전의 두 피해국인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이 8년 전쟁 동안 이라크에게 무이자로 꿔 준 돈이 각각 200억 달러와 100억 달러였으니, 보면 알겠지?? 애네들은 후세인이 참 고마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애네들이 손해보는 장사 했을까??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던가?? 이라크의 경우 80년 GDP의 70%를 차지하던 원유수출 수익이 85년 이후로 30%로 떨어졌다....거기까진 좋은데, 이 이란이라크전이 터지면서 GCC(Gulf Cooperation Council : 걸프 협력회의...간단히 말해서 유럽의 NATO같은 개념이다. 이란 놈들이 좀 과격해서 무섭다라고 생각하던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해서 쿠웨이트, 바레인 등등 6개 나라가 결성한 군사동맹) 가맹국들은 유가 인상으로 떼돈을 벌게 되었다....전쟁 터지니 석유 값 오르는 건 당연한 사실이고...참 돈 좀 만졌지...
문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의 상황이었다.
90년대가 시작하면서 세계경제는 불황이 시작되었고, 산유국들은 어쨌든 시장 점유율을 높이겠다면서 석유의 공급과잉 상태로 몰고 간 것이었다....이라크는 전쟁 끝나고 나니, 사상자만 50만에다가, 80년 전쟁 발발전에 국고의 외환 보유액이 300억 달러나 되었는데, 웬걸, 이젠 빚만 1천억 달러에 이르렀다...거기다가 석유시설은 시설대로 파괴되었으니...이젠 어째야 하나?? 더 골때린건 토사구팽이라...이란이 이제 물러나자 GCC 애들이 이라크를 바라보는 눈이 요상해 진 것이었다...쓰바 이래서 사람은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란이 물러난 지금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되어버린 이라크...쓰바 좆돼 버렸다.
근데 후세인이란 애가 통빡을 굴려보니 상황이 꼭 나쁜 건 아니었거덩?? 지금 좀 힘들어도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어...당장 석유가 나오지, 그 매장량이란 것도 중동지역에선 사우디 아라비아 다음가는 수준이고 말이야. 하루에 310만 배럴이나 석유를 뽑아낼수 있는 이라크인데...후세인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야. 후세인...이제 내치에 힘을 쓰고, 전후 복구에 열을 올리겠다고 착한 맘을 먹게 되었다...근데 문제는 말이다...딴놈들이 딴지를 거는 거였다.
좆만한 쿠웨이트 놈들이 석유 증산정책을 고수하자고 쥐랄을 트는 거였어... OPEC(석유수출국기구)에선 어쩔줄 몰라하는 상황에서 쿠웨이트랑 아랍에미레이트 같은 좆만한 것들이 계속 석유 생산량을 늘려나가는 상황이 한푼이 아쉬운 후세인 돌아버릴 지경인 것이다.
석유값은 점점 떨어지고 미치고 환장할 사담 후세인은 어찌 방법이 없는 찰나에 결정적인 한방을 맞아 버린다. 1990년 봄...유고슬라비아의 수상이 바그다드를 방문하게 되었다...이때 이라크는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이라크의 부통령까지 나서서 영접한 후에 숙소에 들어가는 도중에 수상에게 이라크에 차관을 좀 지원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만, 수상은 거절하였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수상이 유고로 돌아간 다음에 유고슬라비아는 지난 8년 전쟁 때 이라크에 꿔준 차관을 되돌려 받아야겠다는 성명을 발표 해 버린 것이다....
자, 이때 사담의 실망은 장난 아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유고의 발표 이후 다른곳에 차관을 얻기 위해 손을 벌렸지만, 유럽, 일본 등지에서 전부 거절을 당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채무국에서도 돈을 달라고 쌩쇼를 하기 시작했다....이때 이라크 넘들이 한 짓이 쿠웨이트에 수상을 보내서 100억 달러를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이때 쿠웨이트 애들이 이라크에 건네 준 돈이 사담을 또 화나게 만들었다...쿠웨이트 애들은 갈 때 차비나 하라고 5억 달러를 이라크 수상에게 건네주고 입을 닦아 버린 것이었다...
왜 하필 쿠웨이트일까??
이라크 남쪽에 사우디와 끼어있는 쿠웨이트 좀 좆만한 나라 되겠다. 쿠웨이트 박 아저씨가 좆만하단 소리가 아니다.원래 쿠웨이트란 나라는 엄써따...원래 거기 있는 애들은 베두윈 족이라고 유목민으로써 여기저기 사막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었는데, 18세기 들어와서 동서양이 서로 교류하자니 여기가 딱인 것이다...결국 교역 중계지로 서서히 발전하는 중에 1756년 거기 유목민 중에서 "앗 사바하"족이 나타나 주변을 평정하고는 쿠웨이트 왕국을 만들어 버렸다. (이름도 참 요상하지. '앗 사바하'족이라니..)
다 좋은데, 애네들이 이리저리 부쳐서 터키에도 붙고, 영국에도 붙고...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도 잘도 꾸려나갔다가...두둥...석유가 터지고 말았네?? 영국 땡잡았네?? 뭐 하여튼 그랬다...그런데 이 땅에 미국 애들도 찝적거리게 된다...결국 1934년에 영국의 앵그로 페르시안과 미국의 걸프 석유가 공동출자해서 를 차려버리고 말았다...그리곤 아하바드 추장과 2026년까지의 독점 채굴권도 체결해 버렸다...쓰바 완전 날로 먹네...
반면에 이라크 애들이 계속 쿠웨이트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오스만 터키 시대 때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 편입 되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서 찝쩍였고, 1958년 이라크 혁명을 일으켰던 카셈 정권이 1961년 6월26일(쿠웨이트가 독립한지 6일만에)에 쿠에이트 왕을 그 지역의 지사(도지사 정도 되나?? 울나라 도보다는 작나??)로 임명하면서 한번 찝쩍였지만, 이집트가 중심이 된 아랍연맹이 쿠웨이트의 합법 정부를 인정해 버린데다가, 영국 애들이 득달 같이 달려와서 별 충돌 없이 끝이 났다...
그러고나선 1973년 3월에 다시 한번 충돌이 있었다. 이때는 사우디아라비아 애들이 달려와서는 이라크와 서로 노려봤는데...이때는 정말 한판 붙을 기세였거덩...여담이지만, 이때 쿠웨이트 애들이 이라크에 10억 달러를 뒷돈으로 찔러줘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스물스물 들려온다. 뭐 하여튼, 이때도 그 <아랍식> 해결인 일단 일 벌려놓고, 배짱 튕기다 중재자가 나오면 좋게좋게 해결되는 수순으로 일이 잘 풀렸다.... 7개월 뒤에 있었던 4차 중동전...일명 욤 키프르 전쟁 때문에 물러났다는 주장도 있다...뭐 하여튼 물러난건 물러난거니 말이다.
사담은 화가 났다....그것도 졸라많이....
사담은 참...화가 많이 나 있었다. 88년 전쟁이 끝나고 대내외적으로 이란에 대한 승리를 외쳤지만(전쟁 전보다 땅을 쬐끔 더 챙겼다) 상처뿐인 영광이었다...이미 50만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에서 전비 부담금은 계속 압박을 해오고 있었고, 더 골치덩어리는 바로 <군대>였다...이란 이라크 전을 치루면서 이미 100만 가까이 동원 해 놓은 군대가 상당히 불만에 쌓여 있었던 것이었다...이미 1989년에 사담의 군대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이집트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다 빼앗아 갔다며 이 노동자 수백명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그렇다고 사회가 안정돼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군대를 동원 해제 했다가는 앞으로 무슨일이 터질지 사담으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때부터 사담은 뭔가 머릿속에 계산이 서가고 있었을 것이다.
1989년...앞전에 언급한 GCC(Gulf Cooperation Council : 걸프 협력회의)와 대비되는 개념의 ACC(Arab Cooperation Council : 아랍협력회의...이라크와 요르단, 이집트, 북예맨의 지역 군사 동맹체)를 만들어 버렸다...표면적으론 경제 협력체라고 떠들었지만, 지도를 보면 금방 그 의도가 드러난다. 사우디와 쿠웨이트 등등이 모인 GCC 국가들을 포위해 버린 형국이었다. 물론 뭔 일이 있겠냐만은...문제는 이라크의 후세인이 하는 일이었다...걸프전이 터지기 1년전 후세인은 이집트와 요르단에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한다...후세인의 생각은 간단했다...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이 협력해 동맹군을 만들어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하자는 것이다...공격한 다음에 땅은 나눠가지면 된다고...당시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거절하였고, 후세인은 성공하면 250억 달러를 주겠다고 꼬드겼지만, 역시 이집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사담은 이미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하루 195만 배럴을 생산하는 쿠웨이트를 따먹으면 자기는 순식간에 전세계 석유 매장량의 20%를 장악하는 것이다...여기에 세계 석유 매장량의 25%를 가지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까지 따먹으면...전 세계 석유시장은 후세인 맘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거였다.
사실 후세인은 8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제 쌈은 고만하고 나라 발전이나 좀 해보자 하는 식의 건실한 마음으로 몇가지 프로젝트를 세워 놓고 있었다. 바그다드에 지하철도 놓고, 철도도 닦고, 수력 발전소도 짓고 그러려고 했다...사담의 생각은 간단했다. OPEC 애들 잘 구슬려서 석유값을 배럴당 30달러 수준까지만 끌어 올리면 연간 이라크가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600억 달러 정도 되니까 다른 나라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한 4년 부지런히 기름 팔면 빚 까고, 나라 발전시키고, 자긴 영웅 되고 뭐 그런식의 계산이 서 있었다.
그런데...쿠웨이트와 아랍 에미레이트가 똘똘뭉쳐서 증산정책을 펼치네...
(1990년 1월에 기름값은 배럴당 21달러 선이었는데...얼마가지 못해 14달러까지 폭락하게 되었다...)
거기다 지딴에는 열씌미 싸웠는데, 이젠 필요 없다고 무슨 강도 쳐다보듯이 하니 완전 돌아버릴 수밖에...이미 전쟁은 예견되어 있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91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며 유전에 불을 질렀다. 이 불은 쿠웨이트 전역에서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전쟁 전야
1990년 7월 17일...사담 후세인의 연설이 중동지방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선 부근의 유전인 북 루마일라(North Rumaila) 유전에서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원유 24억 달러어치의 기름을 몰래 훔쳤다는 주장으로 시작된 사담의 주장은, 쿠웨이트가 지난 8년간 이란을 막기 위해 싸워 온 이라크를 독 묻은 비수로 찌르는 짓거리(석유 증산정책)를 지금 하고 있다며 끝을 냈다....
사담은 쿠웨이트에게 몇가지 요구 조건을 내 걸었다.
루마일라 유전에서 뽑아간 24억 달러 어치의 기름값을 보상하라.
OPEC의 석유 할당량을 무시하고 멋대로 석유 증산을 해서 이라크에 끼친 손해 140억 달러를 물어내라.
지난 이란-이라크 전쟁 때 쿠웨이트가 이라크에 꿔준 돈 100억 달러 그거 포기해라, 솔직히 그거 우리가 네들 대신에 이란이랑 싸워 준 거다.
쿠웨이트의 와르바와 부비야 섬을 양도해라.
거의 대부분이 돈 달라는 소리 되겠다...어쨌든 공은 쿠웨이트에게로 넘어갔다.
쿠웨이트 거절해 버렸다....사담의 반응은 간단했다. 부대를 쿠웨이트 국경선 근처로 전진 배치시켜 버렸다. 쿠웨이트는 쓰바 늘 하던 짓거리 또 그러네...이런 반응이었다.
이때까지 그 누구도 전쟁이 터질거란 예상을 하지 않았다. 이 부대 배치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하께 기둘려...
결국 협상은 지리멸렬해지고, 결국 사우디가 나섰다...본 우원에게 코란 두권을 안겨주신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께서 중재자로 나서셨다.
1990년 7월 3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에서 이라크랑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가 협상에 들어갔다. 이라크가 쿠웨이트에게 요구하는 건 간단했다. 거두 절미하고 100억만 내라였다. 쿠웨이트 그래도 협상력이 있었던지, 90억 달러만 내겠다고 뻐팅겼다... 이라크 좆만한게 하면서 짜증을 내자 보고 있던 사우디..."씨바 10억 가지고 졸라들 싸우네...드럽다 내가 내께!! 됐지??" 협상은 잘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쿠웨이트 쪽에서 국경문제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이 화근 이었다. 아니 이라크 쪽에서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다. 뭐 그 다음은 간단했다...이라크 협상 대표단 그닥 이라크로 튀었고, 8월 1일 이 협상단은 사담에게 결과 보고, 사담은 혁명평의회 소집한 담에 전쟁 결의, 8월 2일 새벽 2시에 전쟁 시작 이었다.......
미국과 이라크
걸프전이 미국의 <음모>에 의해 발발되었다는 이야기가 설왕설래 오간 적이 있다...워낙 압도적으로 이긴 까닭도 있지만, 미국의 무기 재고를 확실하게 떨어버리고, 그동안 개발해 놨던 무기들 시험 무대 역할을 이라크가 자임한 까닭에 미국측에서 확실히 남는 장사를 했다는 이유도 있지만...솔직히 이라크와 미국은 이란, 이라크전 때부터 그닥 나쁜관계는 아니었다...아니 나쁜관계가 아니라 먼 친구뻘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란-이라크 전 당시에 미국은 이라크에 약 15억 달러어치의 물자를 수출하였고, 그 중에서 5억 달러어치가 선적되었다...그 물자란 것이 무기는 아니어도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었다.
거기에다가 미국은 이라크에게 이란군의 무기와 이란군 동향 등에 관한 정보를 아주 친절하게 전달받았다.
결정적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막바지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압박용으로 걸프만에 미해군의 배치를 증강시키며 실질적으로 이란을 압박해 들어갔고, 실제로 이란 해군 함정 4척을 격침시켜 버렸고, 이란의 해상 석유저장소를 날려버렸다.....
참고 - 사고도 있었다. 이라크의 엑조세 미사일이 미해군의 프리킷 스타크(Stark)호를 날려버린 것이었다....이라크 조종사가 이란 군함으로 착각 했던 것이다...뭐 미군애들도 이게 이란 전투기로 알았으니까 쌤쌤이다...이때 스타크호의 피해는 사망 37명에 부상 21명이었고, 배는 간신히 침몰은 면했지만 피해액이 9천만 달러 정도 되었다...이때 이라크 애들은 미국애들에게 미안하다믄서 보상금 2,700만 달러를 주고 합의를 봤다...졸라 신속하게 말이다.
미국이 이렇게 이라크에 접근한 이유는...역시 이란에 대한 호된 배신감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키워놨더니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가 버리니까 돌아버릴수 밖에...대사관을 공격하질 않나...인질을 붙잡질 않나...하여튼 이란은 좀 제거 되어야 했다.
자 그런데 미국은 사담이 갑자기 1990년 들어와서는 돌변한 모습에 놀랬다....
뭐 일단은 후세인에게 유일하게 직언을 할 수 있었던 사담의 친척이자 당시 이라크의 국방장관이었던 아드난 카이랄라 (Adnan Khairallah)가 1988년 헬기 추락사고로 죽어 버린 다음부터 후세인의 독선에 제동을 걸 인물이 사라져버렸고, 덕분에 후세인은 광기로 치달아버렸던 것일 수도 있다...문제는 사담을 둘러싼 환경이 점점 사담을 전쟁으로 몰고 갔가는 것이다. 그리고 1990년 2월부터 후세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느닷없이 후세인은 걸프만에서 미해군이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이스라엘이 이라크나 아랍에 대한 공격을 할 경우엔 이스라엘 절반을 불태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아무도 이때 이라크에게 뭐라 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자기 혼자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어쨌든, 그 이후로 후세인은 열씌미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후세인을 달래기 위해 90년 4월 12일에 미 상원의원인 로버트 돌을 대표로한 5명의 상원의원 대표단을 보내 후세인을 달랬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후세인을 일부러 도발시켜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음모론적 시각의 접근법을 잠깐 살펴봤으면 한다.
글래스피. 91년 미 상원에서 그녀는 "우리는 후세인이 멍청하다는 걸 바보같이 몰랐었다"고 얘기했다.
일단 사담이 잠깐 미쳤다(?)란 생각을 한 미 국무부는 바그다드 주재 미 대사인 에이프릴 글래스피(April Glaspie)보고 멀쩡하게 제정신 차릴 수 있도록 잘 설득하고 다독이라고 명령한다...글래스피 대사...미친놈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해 전쟁 나라고 부추기는 외교적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순서상으로 보자.
- 1990년 2월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존 켈리 바그다드 방문시
- 우리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분쟁에 관심이 없음을 말한다.
- 1990년 4월 12일, 미 상원의원 대표단 모술에서 후세인과 회담했을 때
- 부시 대통령은 당신과 좋은 관계를 원하고 있다.
- 언론에서 많이 떠들던 90년 7월 24일 글래스피 이라크 주재 미 대사와 후세인의 회견 중 글래스피 대사의 발언(발발 당시 글래스피 대사의 무책임한 이 한마디 때문에 전쟁 났다며 떠들던 기억이 난다)
- 우리는 아랍, 즉 귀국과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과 같은 아랍분쟁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90년 7월 24일 미 국무부 대변인 마가렛 터틸러
- 미국은 쿠웨이트와 어떠한 방위조약도 맺지 않았으며, 특별한 방위공약도 한 적이 없다.
- 90년 7월 31일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존 켈리
- 위에 했던 말 다시 했다.
정말 미국은 이라크가 전쟁을 일으키기를 원해서 이렇게 외교적으로 실언에 가까운 말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착각하도록 만들어, 즉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먹어도 미국은 가만히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자꾸 던져 줌으로써 걸프전 발발을 미국이 "유도"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었다. 그 주장은 아직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