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부파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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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부파 불교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로 갈라졌다.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라 하였다.

바이샬리에서 비구계로 10사를 두고 합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 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파 불교의 성격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부파 불교")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성립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과 경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에 빠졌다.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발달되어 불교는 승원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 불교도가 중심이되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대승 불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초기 대승 불교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기원후 4-5세기 동안 부다다타, 부다고사와 같은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스리랑카의 소승 불교는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소승 불교와 함께 남방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에 있어서 자기 완성을 주장하기 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 대신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보신·응신 또는 화신의 삼신설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 아바다나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대승 경전의 성립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쿠샨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 (재위 127-151)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카니슈카는 푸르샤푸라(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에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카니슈카는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소그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학승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 번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유마경》·《법화경》·《아미타경》· 《십지경》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 사상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인도의 중기 대승 불교

공 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 (c.150-c.250)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 · Madhyamaka karika)》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 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지었고, 공 사상은제자인 제바(3세기), 또 그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파가 성립되었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해심밀경》·《능가경》 등이 나타났다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c. 270-350) · 무착(c. 300-370) · 세친(4세기)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중관파의 공 사상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중기 대승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공 사상 또는 중관 사상의 중관파와 유식 사상의 유가행파는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대승 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인도의 후기 대승 불교

7세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중관파와 유가행파는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 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 불교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 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실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https://steemit.com/kr/@thomaslee101/75bqnn 원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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