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 일흔다섯번째 영화 /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내 어린 시절의 영화도, 주인공은 친구였지.
내 어린 시절, 수업시간 도중 공책에 만화를 그리다 혼난 적이 있다. 짝꿍은 내가 그린 만화를 보다 같이 혼났고. 우리는 복도로 쫓겨나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올리고서 서로를 힐끔거리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 뒤로 짝꿍은 내가 그린 만화의 첫 독자가 됐다. 어쩌면 그날이 내가 데뷔한 첫날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극장에서 몰래 해적판을 찍는 리(윌 폴터)와 화장실에 숨어 그림을 그리는 윌(빌 밀너)이 만나 영화 데뷔작 'Son Of Rambow'를 만드는 과정을 다룬다. 이 발칙한 소년들은 영화 [람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직접 소화하기까지 하는데, 하루는 영화 촬영 도중 호수에 빠진 윌의 목숨을 리가 구하게 되면서 둘은 의형제를 맺기에 이른다. 그렇게 리와 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한창 겁 없을 나이. 그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일 테다.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정도로 그때의 나는 'To Die For'의 정신으로 친구를 따랐고, 어쩌면 '난 너만 있으면 돼'라는 말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그때였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은 친구라는 존재로 가득 채워졌고, 영화로 기록됐다면 주연은 내가 아니라 바로 나의 친구였을 테다. 영화를 찍는 리가 그림을 그리는 윌을 주연으로 낙점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 보면 리의 주변에는 사람이 적다. 관객이 들어찬 영화관에서도 저 멀리 떨어져 혼자 불량스럽게 담배를 피워대고, 가족이라고는 유일하게 형 하나인데 리에게 무관심하다. 학교에서도 나쁜 짓만 일삼아서 그런지 교실에 있는 시간보다 복도에 나와있는 시간이 많고 친구라고는 복도 저 끝에서 마주친 윌 뿐이다. 그래서 나는 리의 심정으로 영화와 마주하게 된다. 내가 리처럼 악동의 자질을 멋지게 갖추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둘 곳이 없어 성격이 모나있던 모습이 비슷한 건 사실이니까. 리는 윌과 영화를 찍으며 '친구'라는 관계의 진폭을 오르내린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생에 가장 기쁜 나날들을 함께 보내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교환학생 디디에르가 윌의 환심을 사게 되면서 리는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어른에게 절교는 단절의 의미로 싹둑 잘라내버릴 수 있는 한낱 낱말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어린 소년에게 이 낱말은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재난과 상응한다. 리는 절교를 선언하면서도 또다시 위기에 처한 윌을 구한 뒤, 혼자였던 가뭄과도 같은 메마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와중에도 친구의 세상을 지켜준 리에게서 나는 한 단계의 성숙을 배웠다.
윌의 주변에는 어른이 많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집에서는 가족이 속한 형제회의 어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정작 제 생각과 마음을 공유할 또래 아이들에게는 말 한마디 걸지 못해 혼자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윌에게 하나의 언어였을 것이다. 그 언어를 알아본 건 문제를 일으켜 복도에서 벌을 받던 리다. 그리고 윌은 리의 집에서 훔쳐보던 영화 [람보]에 영감을 받아 제 꿈을 펼친다. 이 모든 게 리를 만나서 일어난 일이다. 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모른다. 다만 리가 커가는 과정에서 어른들이 정한 교칙으로 착한 애가 될지, 나쁜 애가 될지를 주목하고 판가름할 뿐이다. 엄마의 주변을 맴돌며 윌을 지켜보는 어른 조슈아가 대표적이다. 그는 윌에게 '도움'이 되고픈 어른이라는 것을 자못 강조하지만, 도움 아닌 '감시'로 윌에게 겁을 준다. 결국 윌이 선뜻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언어를) 내어 보여줄 수 있는 건 엄마도,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리던 리는 엄마가 들어오자 그림을 숨긴다.) 조슈아도 아닌, 친구 리다. 리가 있기에 윌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판타스틱한 데뷔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참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소년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가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나에게도 리와 같은, 그리고 또 윌과 같은 친구가 있기에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만들어 볼까 한다. 내가 보고 쓰는 영화의 언어를 알아봐 준 친구 '리'를 위해, 또 내 글의 주인공이 되어준 친구 '윌'을 위해.
그 데뷔작이 나오는 날 나도 리처럼 윌에게 이런 말을 하겠지.
'This is be my best day on top.'
'오늘이 내 생애 최고의 날이야.'
그 제목은 <소년영화백서>가 될 것이다. 소년의 마음가짐으로 소년의 영화를 보고 소년의 글을 남겨볼까 한다. 그러니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에서처럼 제목 'Son Of Rambo'를 'Son Of Rambow'로 쓰는 귀여운 실수가 있더라도 모두 웃어줄 것이라 믿는다. 실수투성이에 어딘가 엉성하더라도 이건 소년의 첫 데뷔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