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후의 썸
오늘은 금요일. 약 한달간 사귀었는데 생일 전날 날 찬 연하남이 나에게 회사에서 보자고 한 날. 그리고 연하남의 수습기간 평가면담이 있는 날.
그를 봤을 때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점심시간 쯤 회사에 출근했다. 너무 신경쓰지 않은 듯 신경써서. 연하남이 날 봤을 때 멋있는 선배로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할 일이 많이 생겨서 연하남이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고 일을 하다가 금방 시간이 지나갔고 그가 와 있었다. 그는 짐을 내려놓고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난 그의 뒤에 앉았기 때문에 난 그가 보이고 그는 내가 안 보이는 상황.
"Hello"
나의 짧은 인사말에 연하남은 날 보았고 멋쩍은 듯 웃으며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꾸벅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냥 그를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오늘 따라 그의 뒷머리가 세팅이 너무 잘 되었다. 아 역시 수트빨이 좋다... 안돼 안돼 정신차려야지.
그는 나보다 두살 더 많은 한국인 매니저 오빠를 찾았고 나는 회의에 갔다고 말해줬다. 이 매니저 오빠는 나만 보면 무섭다고 놀리는 사람인데, 내가 생일 전날 차였다고 말했을 때는 의외로 따뜻하게 위로를 해줬었다. 정말 발이 넒은 사람이라 입사한지 얼마 안됐는데 회식이란 회식은 거의 다 다니고, 3년차인 나보다 회사내의 여러 사람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매니저 오빠는 나에게 저녁에 있을 회사 전체 모임 (캐주얼하게 모여서 스탠딩으로 먹고 마시는 모임이다)에 가자고 졸라댔다. 연하남이 이 매니저 오빠를 잘 따르기 때문에 왠지 같이 갈 것 같아서 싫어하는 척 하면서 간다고 했다.
연하남은 시간이 되어서 평가면담을 하러 갔고, 난 괜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좌절해서 술 퍼마시고 주말내내 게임만 하면 어떻하지? 그는 꽤 긴 시간동안 면담을 하였고,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두고 담배를 피러 나갔다. 근데 나가서 30분이 지나도 안 돌아오는 것이다. 망설이다가 카톡을 했다. "괜찮니?"
다행히 별일이 없다고 답장이 왔고, 정사원이 되었다고 했다. 정말 잘 됐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카톡에 굳이 답장을 안했는데, 회사 메신저로 메세지가 왔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뭐지? 예의 있게 구는 이유가?
회사 전체모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너무 배가 고파와서 매니저 오빠한테 툴툴됐다. 배고픈데 뭐 좀 사주세요. 편의점에 가서 사준다고 하니까 연하남이 우리와 같이 가려고 했다. 가는 길에 매니저 오빠가 연하남을 장난으로 때렸다. 남자끼리 종종 하는 짓이다. "오빠 더 때리세요. 얘는 더 맞아야돼요." 연하남은 당황하면서 날 쳐다봤고 난 속으로 좀 후련했다.
전체모임에는 나와 매니저 오빠, 한국인 전무, 연하남의 평가매니저 그리고 연하남이 같이 가게 되었다. 난 내가 표정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놀리는 매니저 오빠와 투닥투닥거리면서 갔고 연하남은 전무님과 평가매니저와 함께 걸어갔다. 아 역시 날 멀리 하나...?
편의점에서 매니저 오빠가 사준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전혀 배가 채워지지 않아서 모임에 도착하면 음식을 폭풍흡입하려고 했는데 이런... 좀 늦게가니까 음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연하남은 평가매니저와 담배를 피러 흡연 구역으로 슝 가버렸고, 난 나름대로 모임을 즐기기 위해 아는 사람들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에 새로 취임하신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국인 전무님 옆에 붙어서 사장님을 즐겁게 해드렸다. 근데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배가 고파서 사장님께 음식을 더 시키면 안되냐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정말 나이스 타이밍에 높으신 일본인 전무님께서 사장님께 먹을 게 없다고 툴툴거리셨다. 사장님께서 모임을 준비한 스태프에게 음식이 더 나오는지 확인하셨고, 다행히 준비중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난 배가 고파지면 사랑의 감정이고 뭐고 없다. 일단 배를 채워야지 누굴 좋아하든 말든하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신 고마운 전무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음식이 드디어 나왔다!
뷔페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이에나들처럼 음식을 가져가려고 몰렸고, 난 재빠르게 접시에 최대한 많은 음식을 담아 연하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난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연하남은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플 것 같아서.
연하남은 평가매니저와 함께 있었고, 그 매니저는 내가 음식을 가져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환호했다.
"야 XXX(연하남 이름), OOO(내 이름)을 보고 배워! 내가 딱 먹고 싶을 때 이렇게 음식을 가져오잖아! 이렇게 사회생활 해야지 안그래? 나 너 평가매니저 안하고 OOO 평가매니저 할련다."
오호 감사합니다 연하남 평가매니저님. 저는 매니저님 드시라고 가져간게 아니었는데 연하남 앞에서 이렇게 플러스가 되는 소리를 해주시다니.
연하남은 무안하면서도 내가 음식을 가져다줘서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가매니저는 덩치가 꽤 있는 사람인데 그가 우걱우걱 내가 가져온 음식을 먹는 사이에 나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왜 가져왔어, 혼자 다 먹지. 빨리 먹어." 심쿵. 날 걱정하는거야? 오케이, 남자가 관심을 보이면 살짝 밀당을 해줘야하기 때문에 난 음식을 더 가지려 간다면서 두 사람이 있는 자리를 떠났다.
마실 것도 필요해서 드링크를 주문하는데 내 옆에 왠 외국인이 말을 시켜왔다. 그는 프랑스인이었고, 일본인들 사이에서 외로웠던지 나와 대화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하남이 우리 쪽에 왔고, 알고보니 그 프랑스인과 같은 부서였었다. 그러면서 우리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어머, 내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어서 신경쓰여서 온거야?
그 후 나와 연하남은 비슷한 썸타기를 무한 반복했다. 연하남이 와인을 들이킬 때마다 점점 나에게 바디터치를 해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있는데 손이 허리와 엉덩이 사이의 애매한 부분까지 왔다. "여보세요 손 치우세요." "내가 뭘? 내가 어딜 만졌는데?" 허허허 이놈 봐라.
연하남이 나에게 관심을 보일 때마다 난 보란 듯이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고, 정말 기분이 좋았을 때는 연하남이 사장님이 날 찾으신다고 불렀을 때였다. (나이스 사장님!! 오늘 처음 인사했는데 내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 난 정말 이 회사를 3년째 다니면서 분위기 메이커같은 일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날 찾아주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연하남은 그런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왠지 날 다시 본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이 여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이 있는데? 이런 눈빛으로.
11시가 거의 다 되가는 시간 난 정말 체력적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고 집에 가는 채비를 했다. 연하남은 남자들끼리 계속 남아서 마실건지 전혀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가려고? 혼자?"라고 했다. 같이 가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둬야지. 가겠다고 하는 나에게 연하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조심히 가"라고 했다. 흠...걱정되면 역까지 바래다 주던가? 하지만 회사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순 없겠지.
난 무사히 집에 도착하고 지금 새벽 1시가 지난 시간. 혹시나 연하남에게 잘 들어왔는지 카톡이 올까 기다리고 있었지만 전혀 오지 않는다. 하아...이 놈은 정말 썸만 즐기는 선수인가? 사람들 속에서 썸타는걸 즐기는 변태? 그런데 왜 자기가 찼는데 썸을 타는거냐고. 도대체 넌 나랑 뭐 하자는건데?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건데?
소유와 백현의 비가와라는 노래를 듣고 있다. 정기고와 썸을 즐겁게 부른 소유가 가슴 아프게 노래를 부른다.
"비가 내려 하필 또 잠도 못자게. 아직인가봐. 난 아직도 널 기다리나봐..."
일하는곳이 어딘지 궁금할정도로
여러국적의 사람들이 존재하네요 ㅋㅋ
당신은 좀더 냉철하고 툴툴하셔도 상관없어보여요~ ㅋㅋ
일본입니다! 일할 때는 냉철한데 연애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송이님 연애글이 소설 같이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내용이 항상 웃픈데요, 진심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글 올리고싶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