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수 있는 용기: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대문 이미지 by @gamiee
누추한 곳에 대문이 생겼습니다. 무려 3D입니다. gamiee님 감사드립니다.
사람은 어떤 사소한 부탁에 응하게 되면 그것보다 조금 더 큰 부탁에도 응하게 돼 있습니다. 100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흔쾌히 빌려줄 수 있지만 100만 원은 그렇지 않겠죠? 하지만 100원을 빌려 달라고 한 사람이 1000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빌려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10000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다짜고짜 10000원을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에 비해서는 더 빌려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수위를 높여 가다 보면 처음에 100원으로 시작했지만 100만 원도 빌려주게 되는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이를 두고 심리학에서는 Foot in the door Effect 라고 하는데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자기개념 명확성(self-concept clarity)과 관련 있습니다.
난 진지한 사람이야. 난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지. 난 꼼꼼한 사람이야 등등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이미지가 조금 더 복잡한 반면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단순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단순한 사람에 비해 다양한 상황이나 역할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와이프에게 죽어지내는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직장에서는 호랑이 같은 상사일 수 있겠죠. 친구들 앞에서는 유머러스하고 실없는 소리도 잘하는 그런 면모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복잡성(self-complexity)이 높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잡성이 높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일관성 없는 복잡성은 그 사람이 외적 자극에 의해 쉽게 휘둘리는 매우 취약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떤 때 자기복잡성이 건강한 성격 특성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요? 중시하는 가치가 명확하고 그 가치에 따라 일관성 있게 이런 복잡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꽤나 건강한 사람이겠죠. 이런 사람을 일컬어 자기개념 명확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관성 없는 자기복잡성을 지녔다거나 자기이미지가 너무 단순한 경우처럼,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은 사람은 상황적 특성을 비롯한 외적 자극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자기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되는 자기이미지를 소화과정(검증 작업)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죠. 부모의 부정적 평가(ex. 넌 왜 그렇게 게으르니!)를 아동이 꿀꺽 받아삼키는 장면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아동은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요. 부모의 말이 그대로 자기이미지의 일부로 고착됩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내사(introjection)라고 합니다. 성인의 경우에도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으면 내사가 잘 일어나겠죠.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을수록 부정적 자기이미지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자기이미지 역시 내사되기 쉽죠. 사기꾼들은 Foot in the door Effect를 활용할 때 이 긍정적 자기이미지를 적극 이용할 것입니다. 당신 정말 성실한 사람이네요. 당신 정말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크네요. 이타적인 사람이네요. 투자에 관한 혜안이 있네요 등등 긍정적인 자기이미지를 내사하게 하여 그 이미지에 맞춰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도된 행동이 사기꾼에게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뭐 굳이 사기꾼을 끌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에서의 예를 들어볼 수도 있겠네요. 어떤 사람이 나보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면 스스로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사람 앞에서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 쉽겠죠. 자기개념 명확성이 높든 낮든 인간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긍정적 평가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처음 몇 번은 내사된 이미지에 맞춰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내사된 이미지는 원래 자신이 갖고 있던 자기 이미지와 맞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불편하다는 것이죠. 그런 불편감이 성실한 행동의 득과 실을 따져보게 합니다. 기존 자기이미지를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버릴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것이죠.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내사되었던 자기이미지를 뱉어내고 원래 자기이미지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은 사람은 내사되었던 자기이미지를 뱉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죠. 그렇게 사소한 작은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큰 불편감을 야기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베푸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제가 최근에 Foot in the door Effect를 통해 말려들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이 한두 분 계실 것으로 여겨지는데, 저는 매주 토요일마다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모 센터에서 청소년 심리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센터 로비 안내데스크에 자원봉사자가 두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제 갓 심리평가와 상담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입니다. 이 학생이 어느 날 제게 심리검사 결과를 좀 해석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심리평가나 상담을 배우는 길이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릴 수밖에 없는 가시밭길이고 제가 고생한 기억도 나고 해서 흔쾌히 10분 정도 검사 결과를 같이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갈 때마다 매번 그렇게 부탁을 해오더군요. 처음에는 하나의 결과에 대해서만 물어봤지만 나중에는 여러 개를 물어보니 가르쳐 주는 데 30분이 넘어갔습니다. 네 번, 그러니까 4주 정도 그렇게 같이 봐주다 보니 제가 불편해지더군요. 내담자가 약속을 어기고 상담에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매주 네 명의 내담자를 상담하는데 한 명 정도는 꼭 펑크가 나서 그 시간에 봐주었던 것인데, 사실 그 시간에 내담자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복기하는 게 우선 업무입니다. 상담 중에는 필기를 하지 않고 상담이 끝난 직후에 몰아서 대화 내용을 복기할 때가 많죠. 지금까지 세네 번 정도 심리검사 내용을 봐주었는데, 이로 인해 복기 작업에 차질이 생기고 나중에 내담자와의 대화 내용이 녹음된 오디오 파일을 다시 들어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하여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검사를 봐준다고 해서 제게 어떤 이득도 없습니다. 그 학생이 제게 내사한 '좋은 선생'이라는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잘 돌려줘야 할지 고민이 많네요. 지금 여기에 썼듯이 저간의 사정을 잘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기개념 명확성이 낮다면 계속 불편감을 경험하다가 종국에는 그 학생에 대한 분노가 커지겠지요. 호의로 시작했지만 분노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경험들에 비추어 보면, 자기개념이 명확하다는 것은 결국 자기와 타인의 경계가 명확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뭐가 내거고 뭐가 다른 사람 것인지 잘 구분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합니다. 전 그 학생 앞에서 '좋은 선생'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제 자기개념 명확성에서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검사 수퍼비전을 해주는 것은 좋은 선생이 아니라 피학적인 나쁜 선생이거든요. ㅎ
매번 느끼지만, slowdive14님은 심리학에 관해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해 주시네요(글 잘 쓰십니다). 공부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텍스트에 쓸데없는 진입장벽을 세우는 분들도 꽤 많은데요. 물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 가다 보면 어느 정도 난해한 글이 되는 것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호의를 베푸셨네요. 세상에—한시적이면 몰라도 지속적인—공짜는 없음을 배우는 일만큼 훌륭한 공부도 없을 터이고요.
일단 칭찬 감사드립니다. 어깨뽕이 좀 세워지네요. (으쓱) ㅎ 전문용어 남발은 사실 자기가 잘 모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죠. 내가 잘 이해한 개념은 쉬운 말로 명쾌하게 나오게 마련인 것 같아요.
그 학생이 거절당했다고 느낀다면 당장은 기분은 좋지 않을 테지만, 정말 배울 마음이 있는 학생이라면, perspector님 말대로 세상에 공짜는 없음을 배우겠죠. ㅎ 훗날 제가 거절했던 것을 벤치마킹하여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요구할 수 있는 직업적인 유능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보람(?) 있을 것 같습니다.
어깨뽕 으슥하셔도 될듯...저도 와서 slowdive14님 글 조용히 보다가 오늘에서야 댓글을 달아보네요. 잘보고 있다는 인사는 드리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분이 있으니 더 즐겁게 쓰게 됩니다. 심리학 전공해서 심리학으로 밥 벌어먹고 살고 있어요. 아무도 읽지 않는 스크롤압박성 글들이 종종 올라가지만, 이렇게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심리학 글을 쓰는 게 스팀잇에서 제가 추구하는 한 방향입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네^^ 그래도 slowdive14님은 설명을 잘 해주셔서 정신이 맑은날(?) 집중하고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구요.ㅋㅋ 따님과의 데이트글도 잘보았습니다^^
전 자기복잡성이 매우 낮은 것 같네요.
덕분에 사기는 안 당해본 것 같으나.... 사회적 융화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에고와 주관이 너무 강하다고나 할까요;
댓글이 길어질 것 같아 내일 달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