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으로 가는 길 2 - 배바위 물 위에 뜨다
문경으로 가는 길 2 - 배바위 물에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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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문경을 벗어나 예천으로 방향을 튼다. 예천에 들어서자 ‘명궁(名弓)의 고장’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웬 명궁? 하다가 바로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효시와도 같았던 김진호 선수를 비롯해 수많은 양궁 선수들을 배출한 곳이 바로 예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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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지 않은 고장이 세계적 양궁 도시로 뜬 배경은 다름아닌 국궁의 전통에 있었다. 대를 이어 국궁을 만들던 권영학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예천여중고에 양궁부를 만들었던 것이 예천 신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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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김진호는 세계 양궁 선수권대회 5관왕의 신화를 일궈 금메달 하나에 애면글면하던 한국 국민들을 까무라치게 했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이 5관왕은 최강의 실력과 더불어 약간의 행운이 뒷받침된 결과라고 한다. 경기 전날 주최측이 개최하는 리셉션이 열렸는데 무슨 일로 감독과 충돌했던 한국 선수들이 리셉션을 보이코트하고 방 문 잠그고 자 버렸는데 그날 리셉션에 참가한 외국 선수들 상당수가 그만 식중독에 걸려 버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김진호 선수는 다소 수월하게(?) 5관왕에 올랐다고.
언젠가 취재차 만났던 한국 체육대학 김진호 교수 (아마 지금은 정년퇴직했을 것 같은데)를 떠올리며 키득거리는데 예천의 목적지에 이르렀다. 명봉사라는 절이었다. 봉황이 울었다는 뜻의 이 절은 신라 때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향용 그렇듯 불타 버렸고 절 자체로는 그리 흥미를 끌 곳이 아니었다. 역시 목적지는 다른 데에 있었다. 사도세자와 문종의 태실(胎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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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 즉 탯줄을 봉안한 곳을 말한다. 죽어서 묻히는 곳은 능이나 묘였지만 그 탯줄이 보관되는 곳이 태실이었다. 왕의 핏줄이 태어나면 그 태를 모실 곳을 찾기 위해 담당 관원들이 총출동했고 조성된 태실은 그 지역 관원들의 필수적 관리 대상이었다. 또 그 주변에는 일종의 금역(禁域)이 형성돼 출입이나 경작이 금지돼 있었다. 임금의 능들이 높은 산의 자락에 주로 자리잡았다면 태실은 봉우리 정상의 ‘젖꼭지’ 부분에 주로 조성됐다. 따라서 주변 경관이 좋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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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로나는 여기서도 우리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명봉사 출입이 금지되면서 사도세자와 문종의 탯줄을 만나러 가는 길도 막힌 것이다. 그림으로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태실만 봐도 그 위치와 풍광이 기가 막힐 듯 한데 더럭 출입금지 팻말에 가로막히니 이 또한 기가 막혔다. 그러나 어쩔 수 있는가. 막히면 돌아가고 갈 수 없으면 다음에 오면 되는 것이 답사길인 것을.
그림 가운데 태실이 보인다.
다시 문경으로 돌아온 우리 발걸음이 멈춘 곳은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의 한 소나무 앞이었다. 천연기념물 426호 대하리 소나무 . 한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가운데 소나무가 40종으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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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盤松)이란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를 말한다. 천연기념물 가운데 노쇠해서 시들거나 비실거리는 나무들도 많은데 400년 묵은 대하리 반송은 아직 청년 같이 푸르르고 가지들에도 힘이 넘쳐난다. 용틀임하며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소나무는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중 소유이며 근처에 장수 황씨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사정공이란 세종 때 명재상 황희의 증손자 황정을 말한다. 황희의 둘째 아들 황보신은 경상도 상주에 내려와 터를 잡았고 그 손자 황정이 다시 문경 산북면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조선 전기만 해도 처가살이가 흔했고 딸에게 재산도 균등하게 들어갔던지라 처가 덕을 본 것 같다. 그 후 황희의 7대손인 황시간이 종택을 짓고 황희의 유품을 모신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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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된 탱자나무가 의젓하게 마당을 지키고 고풍스런 액자와 처마가 세월을 담아내는 장수 황씨 종택을 이리저리 돌다보니 문득 서울에서 상주까지 내려와 살며 문경 입향의 기반을 제공한 황보신이라는 사람의 행적이 생각나 킥킥 웃었다. 황희 정승은 유능한 재상이었으나 자식 농사는 영 못 지었다. 수신,보신, 치신 아들 셋 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보, 즉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벼슬살이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들들은 꽤나 사고뭉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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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서자로 황중생이라는 자가 있었다. 역시 아버지 빽으로 동궁전에 들어와 일했는데 그가 입궐한 지 얼마 안돼 궁궐의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내수사와 의금부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본디 황중생은 용의 선상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분’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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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내 밝혀진 절도범의 정체는 황중생이었다. 그런데 황중생에서 일이 끝나지 않았다. 궁중에서 빼낸 물건을 팔아치운 장물아비는 황희의 아들 황보신이었던 게 들통났던 것이다. “이건 안되겠다. 아무리 황희 아들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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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더 엄히 처벌받았을 것이나 또 황희 정승의 아들이었다. 황보신은 갖고 있던 땅을 벌금으로 내놓는 정도에 그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아들 황치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벌금으로 내야 할 황보신의 기름진 땅은 자신의 이름으로 돌려 두고 자기가 가진 땅 중에 척박하고 농사 안되는 땅을 바꿔치기하여 내놓은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별 일 없이 넘어갔으니 예나 지금이나 빽은 좋다고 할 밖에. 이 황보신이 경상도에 내려와 문경의 장수 황씨 종중을 이룼으나 종택을 지은 후손 황시간은 후손들에게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행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그 뜻을 받들어오고 있다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고.
아쉬운 것은 이 문경 장수 황씨 가문의 가주(家酒)라 할 호산춘((湖山春)을 맛보지 못한 일이다. ‘황씨 고집’으로 그 비결을 고수하며 수백 년 담가 왔고 지금도 황씨 집안 종부가 기능보유자라 하니 반드시 혀를 적셔 보아야 할 일이었고 한 병은 사와도 좋았겠으나 그러지 못했다. 일행 중에 아내가 끼어 있었던 탓이다. 술 한 병에 기만원을 썼다가는 1년 잔소리감이 되기 십상인데 순간의 취흥으로 1년을 말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주지하다시피 문경은 소백산맥 아래 경상도 첫 고을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산과 고개 사이의 계곡에서는 물줄기가 꾸준히 뿜어져 나오고 이는 천(川)으로 이어져 강(江 )으로 만난다. 양산천과 조령천이 합쳐 영강이 되고 금천은 대하천과 삼강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 금천(錦川) 주변의 주암정(舟巖亭)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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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그저 속담이 아니다. 특히 물길은 홍수 몇 번이면 쉽게 바뀌어 강바닥이 논밭이 되고 수백년 삶의 터전이 강 아래로 들어가 버리는 일이 흔하다. 당장 조선 시대의 잠실(蠶室) 즉, 왕비가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던 그곳은 지금 한강물 아래에 잠겨 있다. 금천도 그랬다. 굽이굽이 흐르던 금천 곳곳 경치좋은 목에는 정자들이 어김없이 서 있었는데 홍수와 제방 공사 등으로 물길이 바뀌면서 어떤 정자들은 졸지에 빛 잃은 등대가 돼 버렸다. 1944년 세워진 주암정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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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정은 인천 채씨 문중의 후손들이 모여 채익하 등 수백년 전 조상들이 노닐던 곳을 기념하고자 정자를 세운 것인데 배 모양의 바위에 의지해 있었다. 금천이 너울너울 흐를 때는 마치 그 위에 뜬 배인양 운치를 즐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물길이 바뀌면서 주암(舟巖)은 모래사장에 끌려 나온 배 신세가 됐고 주암정도 그 풍광을 거의 잃고 말았다. 그 즈음의 주암정 앞에 한 후손이 선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각종 병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을 곳을 찾아다녔다는, 채익하의 10대손 채훈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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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을 잃어버린 주암정을 다시 물 위에 띄우기로 한다. 주변에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 위에 연꽃을 드리우고 주변에는 능소화를 심었다. 모래에 파묻힌 배바위는 새삼 물을 만나 뱃머리를 힘차게 들었고 능소화를 노 삼아 연꽃의 호수를 헤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철이 아니라 그 환상의 꽃배와 꽃뱃길을 보지는 못하였으되 허약한 몸으로 평생을 바쳐 다시 주암을 물 위에 띄운 채훈식 옹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무릇 사람이 망친 경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개는 욕심 때문이었다. 천년 고찰에 보배같은 대웅전을 지닌 수덕사가 처참하게 망가진 것은 그 여승들의 유능함(?) 탓이었다. 낙동강변의 사금(砂金)같던 모래밭과 유유자적 돌아 나가던 강줄기는 이명박 정권의 ‘4대강’으로 아작이 났다. 몇 시간 전 지났던 단양 팔경도 ‘개발’ 때문에 그 허리가 잘리거나 고약한 성형 수술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주암정은 사람의 힘으로 살아났다. 오히려 더 큰 생명력으로 해가 갈수록 쌓이는 아름다움을 지니게 됐다. 그 이유를 나는 채훈식씨가 붙여 놓은 작은 쪽지에서 볼 수 있었다. “주인이 없어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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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훈식씨는 그렇게 공과 힘을 들여 변신시킨 주암정을 사람들에게 온전히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오느라 지친 발과 마른 목을 위한 음료수까지 준비해 두고 행여 자신이 없을 때 먹기를 망설일까봐 빼뚤거리는 글씨로 쪽지를 남겼던 것이다. 그 넉넉한 마음이 있었기에 주암정은 예전의 경치보다도 훨씬 운치 있고, 자연 그 자체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무위인간(?)의 경지에 도달해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일행은 저마다 주암정 주변을 돌며, 또 마루에서 늘어지게 잠도 자고 배 바위를 띄우는 물을 바라보며 흥에 겨웠다. 이 금천과 인근 대하천 일대의 명승지들을 옛 사람들은 ‘석문구곡’(石門九曲)으로 불렀다. 주암은 그 두 번째였다. 누군가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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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曲東亞日月峯(이곡동아일월봉) 이곡이라 동쪽에 일월봉이 솟아 있고
雙巖枕水弟兄容(쌍암침수제형용) 두 바위 물을 베니 형제의 모습이라
亭前浮碧千年久(정전부벽천년구) 정자 앞 푸른 물은 천년이나 되었는데
望裏竹林翠幾重(막리죽림취기중) 대숲을 바라보니 푸름은 몇 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