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 군만두의 추억

in #zzan6 years ago

설 전날 만두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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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음력 설날을 맞아 하루라도 쉬게 됐던 건 1985년이었다. 2.12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사기 위한 코스프레 성격이 강했지만 수십 년 동안 ‘이중과세’(二重過歲)를 공식적으로 저어하고 양력설을 고집했던 관행 탓이겠지만 ‘설’이라고 부르지 않고 ‘민속의 날’이라 불렀다. 단 하루였고, 이는 6공화국 들어서면서 연휴로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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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아니었어도, 심지어 휴일이 아니었을 때에도 악착같이 음력 설을 쇠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부산의 각종 공단의 경우 거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귀성했고 동네 신한모직 공장 앞에는 관광버스들이 수십 대씩 서서 그들을 태우고 고향으로 향했다. 동네에도 음력설 쇠러 간다고 닫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그날 바깥에서 밥 먹을 식당 찾기란 오늘날 자유한국당에서 양심찾기보다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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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한 분식집이 있었다. 부산진여상 올라가는 언덕길 중간께에 있었는데 만두와 핫도그가 특히 맛이 있었다. 내가 살던 골목에서는 좀 멀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엄두도 안나는 거리를 ‘다망구’ 하며 뛰어다니던 터라 무슨 일로 동전푼 생기면 바로 그 집으로 튀어 탐스럽게 구워진 군만두와 설탕과 케첩 가득한 핫도그의 향연을 즐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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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말뚝박기 (서울은 그냥 올라타기만 하는데 부산에서는 말뚝박기 후 가위바위보 해서 이길 경우 맨 뒤에 처박힌 녀석의 엉덩이를 엄청나게 두들겼고 올라탄 모두를 가위바위보해서 이겨야 했다. 좀 무시무시한 룰이었던 셈)하고 놀다가 우루루 몰려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학교 갔다가 오는 길에 낑낑대고 언덕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일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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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네 부부는 말이 느려서 충청도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라도 말투를 쓴 것 같다. 애들이 만두를 퍼먹듯 먹고 있으면 “그르케 마딧냐잉(맛있냐잉)” 이라고 말하며 하회탈같은 초승달 눈매로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부산 말에는 말음법칙이 없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마싰나’라고 발음하기에 그 말이 특이하게 귀에 들어왔던 것 같다. 인심도 좋고 맛도 괜찮아서 부산진여상 학생들이나 인근 집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단골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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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추운 겨울날, 그래봐야 부산이니 다른 지방에 비하면 이른 봄날 같던 날, 애들이랑 축구하고 놀다가 으레 그 집으로 걸어 올라가서 동전들 모아 만두 파티를 했다. 그런데 만두가 평소보다 꽤 많이 쌓였다. 응? 누가 이래 시킸노. 아줌마 우리 8백원어치 시킸는데예. 100원에 4개였으니 32개. 그런데 서너 접시에 나뉜 만두는 거의 50개는 돼 보였다. “내일 구정이잖아. 많이들 묵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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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집이 들썩일 정도의 환호가 튀어나왔다. 이게 웬 떡이냐 아니 만두냐. 입안이 데는 것도 모르고 군만두들을 오그작 오그작 씹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창 그리 먹다 보니 가끔 축구 시합을 하는 윗 골목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왔다. (당시엔 골목마다 왜 그리 애들이 드글거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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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녀석들은 유독 키 작고 얼굴 새까만 아이를 앞세우고 아줌마에게 자랑하듯 외쳤다. “탁이 데리고 왔어예.” 부산 사람들은 이름을 다 부르기도 하지만 좀 친해지거나 익숙해지면 뒤의 한 글자만 부르는 습관이 있다. 나도 “민아”라고 종종 불렸고 “식아” “호야” “진아”는 곳곳에서 난무했다. ‘탁이’라니 이름의 뒷글자가 탁이었으리라. 이상무 선생 만화 주인공 독고탁은 아니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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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신경 안쓰고 있었는데 아줌마가 핫도그 튀기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탁이한테로 가서 탁이를 덥석 안아 준다. 탁이는 뭐 그리 반가워하는 빛도 아니고 왜 이러시는지 잘......의 표정으로 그냥 안겨 있었다. 아주머니는 탁이 머리를 감싸고 갑자기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참말로 그러면 안되는데잉. 그러고보니 윗 골목 아이들이 이 아주머니 부탁으로 탁이를 찾아서 데리고 온 눈치. 이들은 주문도 안하고 자리에 앉아 우리보다 수북한 만두 파티를 열었고 오뎅까지 얻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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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두드리며 나오는데 주인 아줌마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인사가 묘했다. “잘 있어라. 공부 열심히 하고.” 응? ‘잘 가라’가 아니라 ‘잘 있어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오는데 아줌마가 뒤통수에 대고 또 인사를 한다. “우리 구정 끝나고 안 온다. 잘 있어라.” “와 안오는데예.” “우리 고향에서 살 거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또 “공부 열심히 해라”가 튀어나와서 확 돌아서 버렸다. 공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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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데 아까 ‘탁이’를 앞세우고 와서 만두 파티 열었던 윗동네 애들 가운데 안면 있는 녀석을 만나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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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들 오늘 돈도 안내는 거 같던데.”
“진탁이라꼬..... 아까 그 쪼매난 안 있나. 아줌마가 가 데불고 오면 오늘 만두 공짜라 카더라고. 그래서 찾아가지고 안 갔나.”
“아 그 탁이라카는..... 근데 탁이가 뭐 좋은 일 했나.”
“반대다. 글마 핫도그하고 만두 마이 쎄빘다. (훔쳤다) 아줌마 튀기느라 정신 없을 때 사사삭 해가지고... 하루는 딱 걸리 가지고.....”
“걸리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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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아저씨가 열 받아가지고 잡아서 집에 갔는데..... 그 아버지가 아 반 직이 놓고 다음날 끌고 사과하러 왔는데 도둑놈의 새끼는 맞아야 된다고 가게 앞에서 아 두드리 팼는데.... 아줌마가 됐다고 그만하라 캐도 아를 잡았다 카대. 나중에 아줌마가 울었다 카더라. 그만하라고. 됐다고.”  
“근데 오늘 가 와 데리고 왔는데.”
“몬들었나. 저 집 장사 안한다. 구정에 내려가서 안 올라온단다. 아줌마가 우리한테 부탁했다. 탁이 좀 데리고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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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탁이 아버지는 시위를 한 거였다. 도둑질한 자식을 혼낸다기보다는 그래 니가 그렇게 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는가 보라는 식의. 당시에 아버지들 애 잡으면 무섭게 잡았고 필시 만두집 앞에서 굉장한 구경꺼리가 벌어졌으리라. 아줌마는 그 정경을 감당하기엔 심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목구멍에 갈치 가시 걸리듯 맘에 버성겼고 애들한테 부탁해서 탁이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게 그렇게 미안했었구나. 그런데 장사 안한다는 얘기는 뭐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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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뒤에 알았다. 그 아주머니가 동네에서 빚보증을 섰다가 그만 다 털려서 결국 가게 보증금 까먹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을. 즉 그날 내가 본 풍경은 그 아주머니의 마지막 장삿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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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 한 해의 시작은 신정보다는 구정이었다. 묵은 해 일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새해를 맞고자 가다듬고 추스르고 발목 돌리는 날이었다. 그 전날..... 만두집 아주머니는 마치 묵은 때 벗기듯 아이들을 먹이고 싶었고 그 중에도 탁이를 안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 37,8년 흐른 뒤지만 그때 아주머니가 탁이 끌어안고 머리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모습은 옛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 있다.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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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부산에서 장사하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짐들을 이고 지고 버스를 탔을 것이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전라도 어디였으니 조방앞 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를 탔겠지. 아니면 하루에 몇 번 안되는 순천 가는 기차를 타고 갔든지. 오랫 동안 몰랐지만 그날 만두만큼 맛있는 선물도 드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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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그때는 정말 몰랐다. 아주머니가 탁이를 안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며 머리 어루만지던 손길이 세월이 갈수록 이렇게 진하게 되살아날 줄은. 그리고 설 뒤 열리지 않고 굳게 잠겨 있던 셔터와 그 앞에 나동그라져 있던 기름솥단지가 이렇게 눈가를 할퀴며 떠올라 올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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