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서전

in #zzan7 years ago

아버지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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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부산 집에 혼자 내려와 두 다리 쭉 뻗고 있는데 아버지가 부르신다. "잠깐 이리 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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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고 한글 페이지를 열었는데 뭔가를 불러오기 위해 애를 쓰신다. 이상하다 분명히 써 놨는데..... 제가 해 볼게요 몇 번 클릭하니 두만강.... 어쩌고로 시작하는 한글 파일이 있다. 29페이지가 넘으니 꽤 오랫 동안 작성된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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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 자서전이라고 그래야 하나..... 그런 건데 한 번 봐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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훑어보니 아버지가 기억나는 대로 쓰신 당신의 일대기다. 당신의 고향이 함경북도 남양이 된 사연으로 얘기가 시작된다. 독립군 따라다닌 할아버지가 만주의 조선 학교 체육교사로 정착해 살아가고 계셨다. 운동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갑자기 까만 일본 순사복을 입은 자가 운동장에 들이닥쳐서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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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잡으려고 고대했던 당신이 여기 교사로 있을 줄은 몰랐소. 예전에 당신이 나를 사경에서 구해 줬으니 나도 한 번 당신을 살려 주겠소. 24시간 안에 여길 떠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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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십 수년 전 할아버지는 어느 마을 어귀에서 마을 사람들이 누군가를 밀정이라고 몰아세우며 때려죽이려는 것을 보고 밀정으로 몰린 새까만 나무꾼이 불쌍하기도 하고 나는 밀정 아니라며 엉엉 우는 게 진실로 느껴지기도 해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살려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밀정이 맞았고 일본 경찰 간부로 할아버지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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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기절초풍해서 일본 순사 말대로 24시간 안에 허둥지둥 도망가 두만강을 건넜다. 이 일이 1939년 3월이었고 아버지는 1939년 6월 (음력) 두만강 너머 조선 땅 함경북도 남양에서 태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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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교사 이전에 목사님이었다. 1930대 초반 늦은 결혼 (서른을 훌쩍 넘긴 뒤였다) 후 할머니가 "내가 벌 테니 당신은 공부하고 오시오." 해서 그 형편에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목회 활동을 하셨는데 왕년의 독립군 물은 여전히 들어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가 당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가르쳐 주신 독립군가를 적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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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대판 깔닥빠리 (게다 소리를 비웃는 듯) 왜놈아이야.
껍질 문명 하였다고 자랑 말아라
충무공의 거북선이 동동 뜬 곳에
함몰하여 다 죽다가 남은 종자다,
사나이 가는 앞길이 태산과 같이
험해도 승전가를 울러매고 나아갈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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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폭소를 했다. 다음 줄은 이렇게 돼 있었다.
"@@@@@@@@@@@@ 지금은 기억치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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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태어난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두 살 때에는 태평양 전쟁이 이어졌다. 일본은 그 전부터 중국과 전쟁 중이었으니 식민지 조선의 변방은 만주에 비해 먹고 살 것이 훨씬 시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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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병과 (콩기름 짜고 난 뒤 찌꺼기)나 무우밥 등으로 양식을 해결하였는데 도무지 나의 식미에 맞지 않아 늘 불평을 했단다. 엄마는 바보야 밥할 줄도 모르는 바보라고 밥상을 걷어차 버리는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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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키득키득. 아버지 성격은 그때부터 대단하셨구나. 이 괄괄한 막내의 시대와의 불화(?) 같은 식투정 등 여러 모로 고민이 많았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시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만주로 들어가기로 한다. 전쟁 끝물과 해방을 만주에서 맞게 된다. 일도구라는 꽤 큰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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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흙으로 길게 쌓은 성 속에 한 육백여 가구가 모여서 살고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아버지는 다양한 군대를 목격하게 된다. "노랑 각반을 차고 긴 장총을 메고 행진하는 일본군, 파란 무명 군복에 긴 싸리총 (이건 뭔 총인지 모르겠)을 든 중공군. 또 중공군에 잡혀 포로가 돼 비참했던 장개석 군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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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무렵 다시금 공산당 토벌에 나서려 한 장개석이 50만 대군을 만주 지역에 투입했고 이 군대가 절딴나서 결정적인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당시 아버지 눈에 띈 국민당군은 역사의 잔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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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지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기독교인 집안에 할머니의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웬만한 재산을 형성했던 아버지의 집안에도 암울함이 깃들었다. 학교 교단에 지주를 올려 놓고 몇 명이 뛰어올라와 혁대를 풀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인민재판'은 아버지의 트라우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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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버지 가족이 다시 북한으로 들어오고 6.25를 겪고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이 담담하지만 소략하게 기록돼 있었다. 아버지는 간간히 이전의 독립군가처럼 기억하는 노래 가사들을 적어 놓으셨는데 이게 또 역사의 지층 속에 박힌 자갈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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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최초의 선거를 앞두고 북한 당국은 인민학교 아이들을 동원해 ‘새벽송’을 불렀다고 한다. “인민의 한 표 한 표 떳떳이 바치어 내세우자 지지하자 인민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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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나와서 수십 군데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도 기억하는 교가가 있으셨다. 밀양중학교로 기억하시는 교가. “미리벌 복판에 솟은 우리집. 바람에 가득찬 젊은 우리들 누나를 부르던 아기시대는 이맘과 이 마음 닦는 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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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여러 번 들은 얘기도 있지만 모르는 얘기도 있다. 거제도에 살던 무렵,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지나던 오이밭에서 오이를 따 먹고 몇 개를 옷 속에 숨겨 왔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에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사정을 들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는 ‘린치’ (아버지의 표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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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셔서도 한 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할머니였는데 당시 젊은 할머니의 기세는 가히 짐작이 간다. 할머니는 오이밭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는 “오이를 다시 붙여라.”고 말한다. 붙을 리가 없는 오이였지만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붙이려고 했다. 또 다시 ‘린치’가 시작됐고 할머니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제 자리에 붙일 재주가 없는 놈이 왜 남의 물건을 훔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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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머니는 아들을 경찰서에 데리고 간다. (맙소사)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경찰로부터 “소행은 절도범이나 나이도 어리고 집주인 고발도 없고 하니 어머니의 면을 보아 이번에 한하여 용서한다.”는 선언을 듣고 다시금 “죽어도 남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서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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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내리는데 아버지가 연신 어떠냐고 물으신다. 정말 좋은데 이렇게 쓰신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당신이 세상 인연 다하신 후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짤막한 책자로 만들어 전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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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며 다시 아버지의 ‘자서전’을 읽는데 글자 하나 하나가 한 땀 한 땀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아버지의 현대사. 아쉬운 부분도 있고 빼먹으신 대목도 많고 더 자세했으면 하는 내용도 있지만 계속 적으시겠다고 한다. 약속을 드렸다. 꼭 완성하시라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인사이자 역사를 전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다고. 숙제가 생겼다. 그러나 기쁜 숙제고 자발심이 돋아나는 숙제다....... 아버지 꼭 완성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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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도 모친의 자서전을 써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어요.
각자 잘 해보도록 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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