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스터 대대원의 유령

in #kr8 years ago

1951년 4월 22일 글로스터 대대 임진강 전투 개시

한국전쟁을 남북한과 미국 중국 정도의 싸움 정도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아. UN군 16개국 군대가 왔다고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활약상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참전국들 나름대로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허다한 사람들이 죽었어. 그 가운데 한국 전쟁의 운명을 바꾼 전투의 주인공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1951년 4월 22일 시작된 임진강 전투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를 빼놓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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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5월 1일까지 서울을 재점령한다는 목표로 대공세를 펼쳐 왔어. 미군 한국군 벨기에군 영국군 터키군 필리핀군 등 총천연색 깃발의 병사들이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을 맞아 싸웠고. 그 가운데 영국군 29여단 산하 글로스터 대대도 오늘날의 파주 적성 지역에 엎드리고 중공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29여단에게 중공군이 달려든다.

영국군이 19세기까지 착용했던 군복 색깔은 전통적으로 새빨간 색이었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총이나 칼을 맞아 피가 나더라도 별 티가 나지 않아 주위의 동요를 막겠다는 뜻도 있었다고 해. 기실 영국군의 군기(軍紀)는 세계사적으로 유명해. 해난 사고시 “여자와 아이들부터” 원칙을 세웠던 버큰헤드 호 사건에서 민간인들을 보트에 태운 뒤 거수경례를 하면서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영국 해군의 일화를 떠올리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어쨌건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한 대영제국 군대 아니겠냐.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는 거셌고 측면을 맡은 한국군이 물러서면서 영국군 여단은 위기를 맞지. 그래도 가까스로 두 개 대대는 탈출했는데 나머지 하나 글로스터 대대는 그야말로 용코로 걸려 버리고 말았어.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돼 버린 거지. 대략 한 30대 1의 싸움이었을 거야. 하지만 영국군은 이 말도 안되는 전투를 말이 되게 만드는 저력을 발휘한다.

중공군이 나팔을 불며 돌격해 오자 (우리 한국군은 중공군의 나팔 소리와 꽹가리 소리에 무너졌다고 할만큼 중공군은 소음을 이용한 심리전에 능했다.) 지휘관은 군악대의 하사관에게 맞나팔을 불게 해. 부스라는 이름의 하사관은 신호용 나팔을 가지고 후퇴 명령을 제외한 모든 신호를 불어제끼면서 중공군의 나팔 기를 죽이지. 중공군은 바짝 약이 올라서 이 나팔 소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부스 하사는 후퇴하면서 나팔을 수류탄으로 파괴해 버린다. “중국놈들이 불게 할 수는 없지.”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하기 위해 필리핀 군 등 기갑부대를 투입하지만 글로스터 대대에게 가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구출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이때 더 이상 구원군이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대대장 카니 중령의 반응은 이런 게 영국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을 준다. . 그는 부하를 불러 담배를 꾹국 눌러 담으면서 말하지. 남의 얘기처럼.

“그 왜 구원병 온다는 거 있잖아? 그거 못온다나 봐.”

이어서 영국군 지휘부는 글로스터 대대에게 어쩔 수 없는 명령을 내려. “알아서 탈출하라. 안되면 항복하라. 그건 지휘관의 재량에 맡긴다.”

대대장 카니 중령은 이렇게 재량을 발휘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탈출해라. 부상병들은 남아서 항복한다.”

카니 중령은 걸을 수 있었어. 그러나 그는 부상병들과 함께 남는다. 군의관도 남고 군종신부도 모두 걸을 수 있었지만 부상자들 곁에 남는다. 카니 중령에게 한 병사가 겁에 질린 채 묻는다. “저희는 이제 죽나요?” 사선을 여러 번 넘긴 중령의 대답은 간단했어. “뭐 죽을 놈은 죽지만 살 놈은 살더라구” 그리고 카니 중령은 부하들과 함께 항복하고 글로스터 대대원은 40여명만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 재미있는 건 “저희 이제 죽습니까?” 하던 졸병은 끝까지 살아서 탈출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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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대대 생존자들의 모습

글로스터 대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이 전투의 의의는 지대해. 이 전투에서 한 대대가 3개 사단의 발을 묶어 놓았고 중공군의 차후 공세를 지연시킴으로써 결국 서울에 대한 위협을 덜어낸 셈이니까. 이 전투를 그린 책이 <마지막 한 발>이라는 책이야. 한국전쟁 관련 책 가운데 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한데 거기에 한 글로스터 대대원의 이야기가 등장해 .

그는 귀국한 이후 언젠가부터 악몽에 시달려. 자다 깨 보면 자기 발치에 한 동양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거지. 그가 눈 앞에서 죽였던 중공군이었어. 중공군의 귀신이라기보다 이 영국인이 전쟁을 치르며 머리 속에 틀어박혔던 트라우마였겠지. 바로 코앞에서 자기가 쏜 총이나 휘두른 칼에 생명의 빛을 잃어가는 눈을 쳐다봐야 했던 순간이 트라우마가 안되면 이상하지 않겠니.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발치의 동양인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

그런데 그 귀신(?)이 사라진 건 그가 한국을 다시 방문한 뒤였다는구나. 전쟁 때와는 환골탈태 상전벽해로 변한 한국에 크게 놀랐고 자신들을 따듯하게 맞아 주는 사람들에 감복하게 되는데 그 후 그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야. 문제의 글로스터 대대원은 자신이 그 동양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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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이분이 위에 말한 그 노병은 아니다.....

명령에 따라 지구 반대편에 와서 중국인과 싸우고 죽이긴 했지만 그 살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왜 이 피폐한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못 찾고 이유 없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수십 년만에 한국을 보았을 때 (물론 외형적인 면에 치우치겠지만)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난 거야. 자신의 살인과 희생이 어쨌건 아무것도 없는 폐허의 나라에서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는 데 기여했구나 하는 자기 확신을 갖게 된 거지. 그때에야 발치의 동양인 귀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거고.

트라우마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게 됐을 때 갖게 되는 거겠지? 전쟁은 그렇게 지구 반대편 섬나라 젊은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고, 언젠가 내가 중국 내륙 촬영갔을 때 낙양성 부근 시골에서 만난, ‘항미원조’ 전쟁에 참여했던 어느 새까만 노인에게도 트라우마를 전달했을 거야. 그들은 계속 자신과 싸우며, 툭하면 자신의 머리를 죄는 긴고주(삼장법사가 손오공 골탕먹일 때 손오공 머리에 씌워진 금테를 조이기 위해 외던 주문)같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겠지. 어느 글로스터 대대원의 경우 수십 년 간 발치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동양인 귀신과 싸우면서 말이야.

전쟁만큼이나 많은 트라우마를 뿌려대는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살다보니 평생을 고생한 영국군 병사의 이야기가 남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당장 요즘 많은 사람들 뇌리에 드리운 세월호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막중한 죄책감과 패배감에서 벗어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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