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와 페탱
1916년 2월 26일 베르됭의 기적
프랑스의 베르됭은 매우 작은 도시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의 인구는 불과 3만여명이었다. 하지만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땅 가운데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는 성경 구절을 빌린다면 베르됭은 역사적으로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 멸망 후 거의 처음으로 서유럽 일대를 석권했던 프랑크 왕국이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분할되는 베르덩 조약이 여기서 맺어졌고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이 파리로 몰려드는 프로이센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격전을 치룬 곳이기도 했다. 1916년 2월 이 작지만 작지 않은 도시를 주목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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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원수. 그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참호 앞에서 정체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하나의 작전을 내놓는다. “사형장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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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명료했다. “프랑스로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곳 몇 개를 골라 공격하면 프랑스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방어할 것이다. 그때 한 곳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그곳으로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 그를 통한 적의 집중과 괴멸. 기실 별 것은 아니고 한마디로 소모전을 펴서 우리가 덜 죽고 저쪽을 더 죽여서 이기자. 이게 팔켄하인의 생각이었다. 그 ‘한 지점’으로 선택된 것이 운나쁘게도 베르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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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켄하인은 원래 군수(軍需)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철도를 통해 대규모 공세에 필요한 장비와 병력을 차근차근 집결시켰다. 프랑스도 대공세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장소가 두와몽 요새 등 난공불락의 요새들로 방위되고 있었던 베르됭이라고는 짚어내지 못했다. 독일군은 베르됭 전면에 집결한다. 30만 대군이었다. 베르됭이라는 도시 인구의 열 배가 늘어선 셈이고 그들은 2월 21일 베르됭이라는 도시를 지워 버릴만한 대포격을 감행한다. 포격 후에는 독일 황태자가 직접 지휘하는 독일 제 5군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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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선택과 집중’은 성공했다. 베르됭 근처에서 총 한 번 못쏴보고 죽어간 프랑스군이 수만명에 달했다. 승기를 잡은 독일군은 살인적인 포격과 진군을 되풀이하면서 베르됭을 죄어 들어갔다. “저 하얀 도시를 피로 물들이라.” 1차대전 최초로 공중폭격도 실시됐고 1400문의 대포가 수만발의 포탄을 퍼부은 다음에도 프랑스군은 살아남았고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미 첫 공격에 최전방 요새의 지휘관의 머리가 날아갔고 이틀 뒤 600명의 최전방 대대원은 160명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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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월 25일 독일군은 베르됭의 외곽 요새 두와몽을 함락시킨다. 독일군 정예부대로 이름난 브란덴부르크 연대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베르됭 요새를 지켜 내라는 것은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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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사령관 조프르가 선택한 카드가 필립 페탱이라는 이였다. 유능했으나 출세와는 거리가 멀어 나이 예순에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그의 진가를 발휘하여 승승장구한 사람이었다. 페탱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내린 명령은 이것이었다. “내가 지휘한다. 부대에 알려라. 요새를 사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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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이래 프랑스군이 우쭐대며 전개해 온 ‘돌격’을 경멸하고 방어전에 주력했던 페탱은 포대의 위치를 바꾸고 병력을 집중시켜 반격에 나선다. 프랑스군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열세 때문에 물러선 것을 간파하고 즉시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보급과 병력을 순식간에 계산해 냈다. “병력 20만. 그리고 그에 필요한 보급”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들었던 프랑스군에는 활기가 되살아났고 기진맥진 요새를 내줬던 다음날, 2월 26일 두와몽 요새를 재탈환한다. “베르됭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군의 기사회생. 그러나 기적은 더 이상의 은혜를 베풀지 않았고 베르됭은 지옥의 이름으로 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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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병력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격멸시켜 한 번에 전쟁을 끝낸다는 팔켄하인의 전술에 패탱 역시 최대한 독일군을 소모시키는 각오로 맞섰고 베르됭은 불가사의할 정도의 대규모의 희생자를 낳는다. 차제에는 서부전선의 양측의 병력 대부분이 투입돼 그야말로 파리떼처럼 죽어갔다. 양측 합쳐 근 10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쉽게 말하면 인민군과 국군 태반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두개골 없이도 살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발목이 달아난 병사들이 달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잘린 다리를 끌고 거푸 넘어지면서 가까이 있는 포탄구멍으로 들어갔다. 어떤 병사는 1km를 손으로 기어가며 박살난 무릎을 들고 갔다. 또 응급구호소까지 온 어떤 병사는 움켜쥔 손 밖으로 창자가 튀어 나왔다. 우리는 입이 없는 사람, 아래턱이 없는 사람,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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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에는 후일 운명이 갈리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샤를 드골과 예의 프랑스의 희망 필립 페탱. 페탱은 드골을 높이 평가했고 드골도 페탱을 깊이 존경했으나 그들의 관계는 1930년대 이후 파탄이 났고 결국은 패탱은 조국의 배신자가 돼 나찌와 협력한다. 혹자는 프랑스의 영웅으로서 후일 사형 선고가 내려진 재판에서도 박탈하지 못한 “프랑스의 원수” 패탱이 저항을 포기한 이유 중의 하나로 베르됭을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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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울어버린 전황에서 저항하여 또 다시 그 지옥을 보느니 차라리 프랑스의 일부라도 보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기사 자신의 지휘 하에서 풀잎처럼 쓰러지고 고깃덩이로 뭉개졌던 100만의 젊은이들, “페탱 장군 밑에 가면 살 가능성이 높다.”며 자신의 지휘를 따르던 병사들의 눈동자를 페탱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지옥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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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프랑스의 과거청산 의지로 이 페탱 장군의 사형 선고와 추락을 들기도 하는데 프랑스인의 여론은 전쟁 후의 증오와 복수의 열기 속에서도 페탱 장군에게 동정적이었다. 재판정에 그가 들어와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일동 기립했을만큼. 그의 사형 선고를 지지하는 여론은 단 3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할 만큼. 그러나 사형 선고는 내려졌고 한때 그가 존경했던 상관에게 드골이 베푼 은전은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한 것이었다. 유배지에서 죽어가면서 페탱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분명히 베르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휘한다. 부대에게 전하라. 요새를 사수하라고.” 라고 명령하던 날의 포성, 아우성, 그리고 끝내 요새를 탈환했던 2월 26일의 '베르됭의 기적' 과 그 후 펼쳐진 백만의 무덤을.
저는 코박봇 입니다.
보클했습니다 :) 점심 맛있게 드세요!
어떤 전쟁도 악이고 불의라고 본다면 차라리 포기가 선인수도 있지요. 저항이란 걸 모르는 라오스도 이런 경험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 지옥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 가능성 충분합니다.
그 지옥.... 정말 되풀이안되길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