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허생전 - 허생, 이완 기자를 만나다

in #kr6 years ago

신 허생전 - 허생, 이완 기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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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장수하였다. 멀리 서양의 금 만드는 이들이 찾아 헤맸다는 현자의 돌을 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효종 연간의 사람이 영정조를 거치고 안동 김씨 세도를 지나 대한제국을 보고 일제 강점을 버티고 전쟁과 분단 70년을 두 눈 뜨고 목도하였으니 아는 사람은 그를 지극히 괴이하다 하였다. 그 동안 지켜본 사람과 일의 크기와 깊이야 닐러 무삼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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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묵적골 오막살이에서 살았던 것처럼 남산골 아래 쓰러져가는 시영 아파트 단칸 아파트에서 살되 그 지혜와 국량은 효종 연간의 허생의 천 배는 되었다.

하루는 친일청산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완이라는 기자가 있어 허생을 찾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장 큰 가치는 친일청산이라고 주장하던 그는 친일청산의 묘수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극구 만남을 거부하던 허생을 십고초려한 끝에 겨우 무르팍을 맞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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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경술국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원한의 35년간 일본에 당한 치욕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오. 하물며 그들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리던 이들이 지금껏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혁파돼야 할 시대적 과제라 할 것입니다 부디 어진 선비께서는 지혜를 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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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가 분연히 말하였다. 이에 허생이 케이블 티브이 전원을 끄고 느릿느릿 말하되 “당신 가지고 온 안동소주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고 즐겁게 술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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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가 계속 열변을 토하였다. “친일파들의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세금 들여 문화재로 정비되고 있사옵고, 김무성 같은 친일파의 아들이 득세하였고 박근혜같은 일본군 장교의 딸이 대통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지금껏 빈궁하게 살고 있으니 하늘 아래 이런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늦었더라도 이 모순을 바로잡고 친일청산을 하려고 하니 그 지혜를 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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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처음으로 손을 들어 말문을 막고 대답했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구나. 그래 그대는 기자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바른 말로써 세상을 논하고 용기로써 진실을 구해야 할 자로구나. 네가 친일청산을 하려고 한다 하니 내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겠는지 묻겠다. 네 입으로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이 땅을 좌지우지하고 독립투사들은 곤궁하다 하였다. 그 말이 맞느냐?”
“그러하옵니다.”
“요즘 너희 사회의 주류라는 이들이 과거 조선 왕조의 탐관오리들처럼 욕심 많고 사악한 자들임을 내 모르지 않으나 친일청산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친일파의 후손은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알려진 이들 가운데 신모 의원이나 홍모 의원처럼 여당의 중진이거나 핵심인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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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너희들이 말하는 자한당류가 아니라 친일청산에 찬동하는 이들의 가계를 먼저 뒤져 그 친일행각이 입증되면 그 가산을 헌납하여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을 구완하자고 주장할 수 있느냐? 먼저 친일청산 하자는 쪽이 당당해야 저쪽의 몽니를 제압할 수 있을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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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어렵습니다. 제 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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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나는 원래 ‘제 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외면하다가, 이완 기자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일본 군함이 자기네 군기를 달고 오는 것도 보기 싫고, 외교 공관 앞에 저들이 마다하는 동상을 하나도 아니고 경쟁적으로 세우며, 일본만 나오면 5천만이 대동단결하는 그 심정은 내 짐작을 한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하던 꼴을 똑똑히 보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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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네 말대로 일본에 그리 원한이 깊어 70년이 지나도록 그 한을 풀 길이 없고, 이미 백골이 된 친일파들을 숙청하자 하겠다면 먼저 친일파의 주인이었다 할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단속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국가적으로 사과하며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강제 징용 개인 배상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 상징인 욱일기를 계속 붙이고 다니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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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즉각 일본과 외교 관계를 끊고 일본 제품을 일절 사들이지 않으며 일본 문화 수입을 금지하고 관광도 폐해야 할 것이다. 그리 하자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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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는 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난색을 표하였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그렇게 할 일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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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다시 케이블 티븨 전원을 켜며 말하였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주장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우선 네가 말하는 친일파들이 누구이냐.”
“친일인명사전이 이미 편찬돼 있사옵고 반민족행위자 명단도 이미 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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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독재 정권에서 ‘빨갱이’ 잡던 것을 생각해 보아라. 그 중에서 진짜 공산주의자도 수두룩했겠으나 그가 쓴 글줄, 여러 상황에서 낸 말들, 어울린 친구들 덕에 빨갱이로 몰려 피를 본 사람이 어디 한 둘이냐. 너희들의 사전과 명단이 정확하고, 그에 따라 단죄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과연 빨갱이 잡던 사람들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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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이원수 같은 이, 일제 강점기에 어린이들의 동심을 매만져 주었고, 해방 후에는 전태일을 최초로 동화로 다룬 이였으며, 좌익 의심을 받아 해외에도 나가지 못한 이가 어디 농협 기관지 같은 곳에 친일 논설 몇 편 실었다고 하여 노덕술이나 하판락이나 김태석같은 악질들과 같이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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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홍난파를 친일음악이라 하여 음악 교과서에서 다 빼 버리겠다면, <봄처녀>부터 <봉선화>까지 우리 노래는 어디로 가겠으며 금광왕으로 소문난 이로써 허헌 등과 손잡고 ‘모두가 잘 사는 대동 공동체’를 꿈꾸며 독립운동가들의 생계도 책임졌던 영화 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 북한에 올라가 광업상까지 지낸 그도 친일인명사전에 실렸는데 대관절 그 기준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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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맥락이나 인생의 경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행적 몇 가지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너희들은 인촌 김성수를 오갈데없는 친일파라 여긴다만 그가 민영휘와 같은 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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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완 기자가 흥분하였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역사의 평가를 무시하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가족들 굶겨 죽여가며 독립운동했던 분들의 공은 무엇이 되며, 그분들이 그 고생을 할 때 국내에서 호의호식하며 일제의 발바닥을 핥은 이들의 죄는 어찌 묻는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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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 독립운동을 했다 한들 일단 변절한 자들은 그대로 일제의 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일제 군대에 자원해 나가라, 정신대 나가라 연설하고 비행기 헌납하고 그러면서 배 불리고 재산 얻고 그 부가 오늘까지 이어져 나라의 적폐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친일 행적에 둔감할 수 있으며, 관용과 여유를 주문한단 말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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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허생이 처음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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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의기는 알겠다. 그 행적을 밝히고 기억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을 드높이는 것이야 과거의 공신 대접보다 더해도 아무 탈이 없으리라. 거기에 나라 돈을 쓰고, 큰 피해 보신 분의 후손들은 3대손이든 4대손이든 증조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부르짖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쪽에 힘을 쏟으면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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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는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나는 어르신에게 친일청산의 방법을 여쭈었습니다. 가장 쉬운 주장이 무엇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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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크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아하하하. 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냐. 요즘 너희 말로 ‘리즈 시절’이라는 것이 있다 하였는데 바야흐로 나의 ‘리즈 시절’로 돌아갈 방법이라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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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니고 조선시대 있었던 연좌율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

친일파 본인은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면 그 3대손 4대손이라도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 법을 만들자고 주장하거라. 아울러 역적의 후손은 과거도 보지 말라 했으니 공무원 시험에 불이익을 주고 공직 임용도 제한하자고 하거라. 그런데 이는 갑오경장 때 폐한 바요, 이후로 너희가 미워해마지 않는 전두환이 형식적으로나마 없앤 일이요 근대 법 체계와도 맞지 않는 일이다만 어쩌랴. 네가 민족정기를 부활시키고 싶다면 가장 빠른 길인 것을. 그런데 네가 대놓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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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기자는 풀죽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위헌 소송이 홍수가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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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허생은 몸을 일으켜 크게 꾸짖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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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차 친일청산이란 무엇이냐. 역사를 바로 보는 일이다. 과거의 오류를 되짚고 영광을 기억하며 충성스럽고 성실했던 이들의 공덕을 기리고 그렇지 못한 이들의 잘못을 파악하는 일이다. 바로 보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해지는 일이다. 무엇엔가 씌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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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역사는 두부같이 모나고 선명하게 잘리는 물건이 아니다. 외려 칡넝쿨처럼 얼키설키 섞여 있고 어디까지가 줄기인지 어디부터 뿌리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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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가 했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주워섬긴다. 정작 신채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나 그건 차치하더라도 명심하거라. 역사는 ‘기억’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지 ‘단죄’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독립운동가 집안과 친일파 집안이 통혼하여 자손 남긴 예도 흔하고 한 집안에도 독립운동가와 악질 친일파가 공존했던 것도 지천인데, 친일인명사전의 수천 명 인사들을 어떻게 ‘청산’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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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고, 그들의 행적을 밝히는 것이 청산이라면 계속하라. 그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쉽게 낙인찍고 단죄하지는 마라. 그 단죄를 하는 것이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착각하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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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분명하지 못한 단죄는 힘이 없다. 그리고 가능하지 않은 단죄를 외치는 일은 즐겨 누군가의 이익이나 효용 없는 한풀이로 귀결되며 뼈다귀같은 명분으로만 남을 뿐이다. 바로 수백년 전 네 이름과 같은 대장 이완이 나를 찾아왔을 때 논했던 ‘북벌’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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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북벌이 전쟁으로 청나라를 거꾸러뜨릴 일이랴. 원한을 불태우고 분노만 쌓을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라를 개혁하고 바로잡고 모순을 해결하여 청나라를 능가하는 나라가 되는 것도 북벌이었다. 아니 진정 전쟁을 하겠으면 그렇게 만든 뒤에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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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완 대장은, 임금은, 서인이고 남인이고 노론이고 소론이고 양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걸 얘기하면 “이 치욕을 씻지 않고 무엇을 한단 말씀이오.” 호통 치는 건 아주 호걸이었다. 너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으냐? “친일청산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 너는 친일파가 무엇이냐는 내 질문에 친일인명사전 외에 답한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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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을 진정으로 하려거든 일단 친일파가 생긴 연원부터 역사에서 돌이켜라. 왜 나라가 망했는지, 백성은 무엇을 잘못하였고 임금은 어떤 헛발질을 했는지, 국제 정세는 어떠하였고, 무슨 대처가 잘못되었는지를 깨우쳐 보고 오늘날과 비교하라. 대입하지 말고 참고하라. 분노하지 말고 계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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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친일파가 맞다 아니다 논쟁하느니 (진짜 나쁜 놈들은 논쟁 필요도 없이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너희에게 드리운 모순이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빠르리라. 공장 굴뚝에 누군가 올라가서 수백 일을 버티며 뭔가를 외친다면 최소한 나라의 절반이 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 망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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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만큼 간악하고 사람들 등골 빼먹는데 이력이 난 이들이 지금도 권력과 자본을 휘두르고 있을진대 무엇하러 백골이 진토된 그들의 조상을 탐험하려 하느냐. 당장 오늘 싸울 일이 널려 있는데. 당장 벌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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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듣던 이완 기자는 분연히 일어나 “이런 친일 꼴통 늙은이! ” 하며 침을 뱉고 돌아서니 허생은 다시 드러누워 케이블 티븨 영화 채널을 보며 영화를 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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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글이군요. 과연 연좌제를 부활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허생전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고전인 것 같네요. 또 잘 각색하셨어요. 현대판 허생도 비슷하게 말을 했을 겁니다.

^^ 한 번 재미로 해 봤습니다만 동의 감사드립니다.

‘친일 청산’, 여기부터 손대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놀고 앉았네 ③ 일제 36년? 버젓이 교과서에 실린 ‘정신 나간 셈법’

날짜까지 계산하면 34년 351일로 14일이 모자라는 35년이다.
이에 대해 34년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치욕스런 역사이니 채 1년에 못 미치는 1910년, 1945년은 제외하고 나머지 햇수만 취하자는 논지다.

반대로 강단사학회는 만 35년이 안되는데도 구태여 36년으로 늘려서 기술하고 있다.
결국 이 ‘정신 나간 셈법’ 일제 36년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린다.

강단사학이라는 말 좋아하지 않습니다. 워낙 민족사학(?)에 대어서요.

쟁점을 잘 짚어낸 글입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친미,친일, 친중 다 약자의 설움이지요.
중요한 점인 친미, 친일, 친중을 해서 국익을 최대화 한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지요

우리 역사는 그걸 잘해 온 역사와 말아먹은 역사가 공존합니다.. 우리는 잘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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