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의 노래

in #zzan7 years ago

1989년 7월 6일 일본 ‘국민 영예상’ 미소라 히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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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본 관광을 다녀 왔었다. 그 살벌한 물가에 지갑을 여닫는 손이 베일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여행이란 즐거운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자체가 새로움이고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이드가 한 인물에 대해 해 준 이야기는 매우 큰 인상을 남겼다. 다음은 가이드가 해 준 설명을 거의 그대로 옮겨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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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월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합니다. 이 사람 아시다시피 참 오래 살았죠. 이봉창 열사가 폭탄을 던져 죽이려고 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지요. 1926년도에 덴노가 돼서 1989년 죽었으니 그 동안 일본이 경험했던 독재와 전쟁의 광기, 재건과 번영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굽어본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이 죽음으로서 그 연호인 쇼와 시대가 끝나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죽었을 때, 일본의 언론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냅니다. ‘이제야 쇼와 시대가 끝났다.’ 히로히토만큼이나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고, 일본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인물이라는 뜻이겠죠. 그의 이름은 가수 미소라 히바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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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주는 ‘국민 영예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현저한 업적을 남기고 또 그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준 이들에게 정부가 주는 상이죠. 1호는 바로 홈런왕 왕정치였고, 그 외 유도의 명인이라고 하는 마쓰시다나 세계 각 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우에무라 나오미같은 이들이 뒤를 이었지요. 미소라 히바리는 일곱 번째 수상자였는데 여자로서는 최초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영광을 생전에 받진 못합니다. 그녀는 ·1989년 6월 24일 죽었고, 국민 영예상은 7월 6일에 수여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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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가수였길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쇼와 시대가 끝났다’고 하고 국민 영예상까지 수상했을까요. 쉽게 이해를 시켜드리자면 이미자와 조용필을 합쳐 놓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파란만장한 삶까지 더하면 최진실 생각도 납니다. 요코하마 생선장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그 구슬프고도 맑은 목소리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인들의 가슴을 녹여 놨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일본인들은 시름을 잊었고 개미처럼 일한 뒤 그녀의 노래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지요. 그녀는 수십년간 일본의 톱스타였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기일이 되면 특집 프로그램으로 뒤덮일 정돕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불행한 가족사가 있습니다. 우선 그녀는 한국계였습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이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만 그녀의 아버지는 경상도에서 건너온 재일교포였습니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생선 장수를 했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여 미소라 히바리를 낳습니다. 전쟁 후 미소라 히바리가 가수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미소라 히바리의 미래를 위해 한국계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아버지와 이혼을 합니다. 아버지는 계속 생선장수를 했지요. 미소라 히바리는 그를 공개적으로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가끔 시간이 나면 새벽에 차를 달려 요꼬하마로 가서 먼발치에서 아버지를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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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만났던 풍경을 소재로 한 노래가 “항구의 13번지”입니다. ‘긴 여로의 항해가 끝나서 배가 항구에 머무르는 밤에 바다에서 힘들었던것을 술잔에 모두 잊어버리는 마도로스의 술집 아 항구의 13번지.....’ 뭐 이런 노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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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몹쓸 병에 시달리던 무렵, 그녀에게 미국의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제의가 들어옵니다. 가수로서는 일생일대의 명예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때 제가 그 인터뷰를 봤는데요. 기자들이 왜 그런 좋은 기회를 마다했는가 물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일본을 떠나서 공연하고 싶은 나라는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한국입니다. 제 아버지의 나라 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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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여운이 있는 가이드의 열변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금의 과장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기로 미소라 히바리가 공석에서 자신이 한국계임을 밝힌 적은 없다. 그리고 <항구의 13번지>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다는 얘기도 재일교포 사회에서 오가는 여담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그를 가수로 키운 어머니와 친했던 스즈키 마사부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한국 공연을 소망했던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이뤄지지 못했을 때 안타까와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한국 공연을 막았던 것은 일본이라기보다는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자의 노래가 왜색이라고 금지곡이 되는 나라였으니 오죽하리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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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뒤 미소라 히바리의 음악을 찾아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이다 아니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수한 한국인 따위의 얘기를 하고 싶은 맘은 터럭만큼도 없다. 다만 단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밝힐 수 없었고, 자신이 숨겨온 반쪽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려고도 했으나 그 반쪽으로부터도 거절당했던 한 가수의 애달픔에 동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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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일부러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역도산에게 보내는 마음처럼, 통산 400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한 일본 프로야구계의 ‘가네다 천황’으로 군림했으나 일본 법무성에서 찾아와 “어서 귀화하라”는 종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귀화했다는 김경홍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처럼.

미소라 히바리의 마지막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의 번역 가사다. 한 번 음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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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모르는채 걸어왔네, 좁고도 긴 이 길을
뒤돌아보니 저 멀리 고향이 보이네
울퉁불퉁한 길이나 구불구불 굽어진 길
지도 조차도 없는 그것 또한 인생이지
아, 흐르는 강물처럼 느긋하게
몇 세대의 시대가 흘러
아, 흐르는 강물처럼 하염없이
하늘은 황혼에 물들어 갈 뿐이지

산다는 것은 길을 떠나는 것, 끝이 없는 이 길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데리고 꿈을 찾아가면서
비에 맞아 질퍽거리는 길이라도
언젠가는 다시 맑은 날이 올테니까
아,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 흐르는 강물처럼 변해가는
계절 눈이 녹는 것을 기다리면서

아,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르게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1989년 7월 6일 일본 정부는 미소라 히바리에게 국민 영예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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