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팔순을 맞이하며
아버지 팔순입니다. 번잡한 것 싫어하셔서 거창한 잔치는 일찌감치 파했고 탈탈 털어 열 명인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과 점심상 한 번 거하게 갖는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어제 할아버지와 이모 산소를 다녀온 뒤 모인 저녁상 앞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화려한(?) 학창 시절을 꺼내 놓으셨습니다. 화려한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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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큼 학교 많이 옮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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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설명을 듣자면 최초로 학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신 건 만주에서였습니다. 해방 직후였을 테고 웬만큼 터전 잡힌 사람들이 아니면 해방 조선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수많은 만주지역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들어왔고, 문익환 목사의 선친인 문재린 목사와 절친이셨던 목사님으로서 돈 버는 재주와는 영 관련이 없던 제 할아버지도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가시는 걸 택했고 어찌 어찌 하다가 함경남도 홍원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아버지는 홍원 인민학교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를 보내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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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인민의 아편을 생산하는” 목사 아들이라고 엄청난 구박을 받던 아버지는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올라와 홍원을 점령한 한 달여 가량, 극히 짧은 왕자 대우 (할아버지의 교회 청년들이 반공 유격대를 차리고 인민군들과 싸웠으니 별로 생각이 없으셨던 할아버지가 자동으로 홍원 지역 무슨 위원장이 됐던.....)를 만끽하다가 별안간 수업 중 작은 형에 의해 끌려나오게 됩니다. “책보 다 때려치우고 빨리 나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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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처 달려가 탄 기차가 홍원에서 흥남 가는 마지막 기차였습니다. 흥남에서 있었던 드라마같은 이야기는 여기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웬만한 드라마 뺨치는 사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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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버지는 그야말로 학교 유랑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를 목회자로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 했으니까요. 제주도 동국민학교도 잠깐 다녔고 서귀포국민학교도 잠시 적을 두셨습니다. 제주도 놀러 가셔서 제주도 사람을 만나서 두 학교를 들먹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 선배님 고개를 숙인다고 으쓱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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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가운데에서 아버지는 제주도 사투리를 가장 빨리 익히셨다고 자랑이십니다. 동네 이장 아들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피난민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내일은 미역 따는 날이니까 어디어디로 와라.”고 이장 아들이 얘기해도 다른 함경도 출신 피난민들은 어리둥절인데 아버지는 그 말을 알아듣고 해변에 나가서 ‘미역을 칭칭 감고’ 와설랑 피난민 캠프에서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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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 뉘귀 자식임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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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제주도 사투리를 익힐 즈음 이번엔 거제도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장승포국민 학교를 졸업하게 되죠. 거제도 놀러 갔을 때 장승포 변한 모습을 보고 놀라시면서 과거 전쟁통의 추억에 젖으셨죠.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관련된 으스스한 이야기, 미군이 버리는 전쟁 포로 군복을 얻기 위해 달렸던 이야기, 그 와중의 기쁘고 슬펐던 이야기, 버튼을 누르면 자동 재생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중학교는 뭍으로 가게 되는데 밀양, 대구, 부산 등 수십개 학교를 전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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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평생 친구였던 아저씨 한 분과 만나게 된 계기는 재미있습니다. 수십년 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어느 회사 강당에 피아노가 있기에 문득 ‘그 학교 교가가 생각이 나서’ 밀양 중학교 교가를 피아노로 치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 풍금 치는 사람 어깨 너머로 건반을 익혔고 악보를 보지 않고 찬송가는 꽤 많이 치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명이 문을 쾅 열고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어 그 노래 어떻게 알아요. 밀양중학교 몇 기요.” 밀양중학교 출신이었던 거죠. 어영부영 밀양 중학교를 매개로 두분은 평생 친구가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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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본적은 대구입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이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전화가 왔었죠.
“아빠 내 본적이 왜 대구야. 왜 대애애애구우우냐고"
"할아버지가 피난 나오셔서 호적받은 데가 거기라 그래"
"아니 그래도 하필이면 대구냐고. 아 그 이상한 동네"
(언어 많이 순화시킨 겁니다. 더 심하게 얘기했죠)
"말조심해 임마 니 고모부도 대구 사람이야"
"고모부는 제외하고. 아니 나는 대구 싫어. 이상한 사람들이야. 죽어도 새누리 찍잖아. 근데 내가 왜 본적이 대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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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합니까 하필 아버지가 대구의 중학교에 다닐 때 남한 호적이 나왔고 당시 거주지가 주소지가 된 걸.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 가면 대구 친구들이 즐비하게 나오셔서 거창한 식사 대접을 했던 걸 기억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믿음’을 선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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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걔들 다 주일학교 끌고 나갔거든. 말 안 들으면 좀 주먹 휘두르면서 끌고 갔거든. 그래서 예수 믿게 됐다고 고마워들 하지. 그때 애들이 지금 다 장로야”
“근데 아버지는 왜 장로 안하셨어요.”
“장로는 믿음 좋은 사람이 하는 거야. 나는 그런 거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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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열 몇 군데 돌아다니던 중 정착의 기회가 옵니다. 할아버지의 친한 벗이 부산 교육감인가가 됐고 “고2 때까지 소숫점을 못 찍고” 애들하고 어울려서 돌아다니는 거나 좋아하는 막내 아들을 부산 지역 학교에 넣어 주마는 언질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교육감(?)이 내민 카드는 두 개였습니다. “동래고등학교에 갈래 00고등학교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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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으면서 저는 본능적으로 “당연히 동래고등학교지!”가 튀어나왔습니다. 부산의 명문이라면 경남고 부산고 다음이 동래고입니다. 꼴찌를 해도 동래고등학교에서 꼴찌를 해야죠. 그러나 아버지의 선택은 00고등학교였습니다. “동래고등학교 가면 잘 못놀 거 같아서”였죠. 고등학교 인맥이 철저하게 중요했던 아버지 세대에서 이 선택은 두고두고 후회하는 악수가 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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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고등학교 수십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공부 할 일이 없었던” 아버지는 막판 스퍼트로 대학을 가셨고 그 뒤 수십년 동안 여러 직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바다 속 물방울로 이리저리 휩쓸리며, 하지만 부서지지 않으며 한 가족을 일구셨고 오늘 팔순을 맞게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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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서전을 써 보려고 컴퓨터 워드를 쳐 보는데 아 이젠 정말 손가락이 어떻게 안되고.... 타자는 치는데 그 기능들을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아버지가 웃으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냥 어머니한테 이야기해주는 식으로 사연을 구술하시고 녹음만 해서 달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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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시간만 허락하면 며칠 휴가 내서 아버지 이야기를 주욱 듣고 자서전 자비 출판이라도 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 다음엔 후회가 닥칩니다. 팔순 선물 그걸로 할 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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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애들 깨워서 팔순 잔치(?)에 가야겠습니다. 소담하고 간략한 팔순이지만 한국 현대사 속에서 80년을 버티고 겪고 치러낸 작은 역사의 기념일입니다. 만주와 함경남도, 제주도와 거제도, 밀양, 대구, 부산, 플러스 몇몇 곳의 학적 및 이력을 소유한 분도 한국 역사에서 드물지 않을까요. 그 경험 또한 그렇고 말입니다.
아버님 자서전 출판.. 멋진데요 다음에 한번 시도해보세요
즐거운하루되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ㅋㅋㅋ 아이고 ㅠㅠㅠ
아버님 팔순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팔순 정말 축하드립니다.
사진책을 하나 만드셔도 될듯합니다.
아버님 인생사를 쭉 나열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나라 모든 노인들이 거의 대부분 그럴 겁니다..... 워낙 힘든 시대를 사신 분들이니까요 그렇지만 태극기 부대는 시러요 ㅠㅠ
아버님 생신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닷
이것은 표절 없는 글이 나올 수 있겠군요.
팔순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 실감납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글 쓰셔서 재미있게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