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톨스토이와 소피아 - 이광수와 허영숙

in #kr4 years ago

조선의 톨스토이와 소피아 - 이광수와 허영숙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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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0월 16일 조선 총독부가 실시한 의사고시에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합격자가 배출됐습니다. 허영숙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얼핏 가정환경을 살펴 보자면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다행히 웬만한 재산이 있어 식민지 조선인들 대부분이 겪은 가난의 고통으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웠던, 운 좋은 네 자매 중 막내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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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신식 교육을 받았던 막내는 매우 영특했습니다. 열 일곱 살 나이에 의학 공부를 하겠다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걸 보면 강단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허영숙이 일본 유일의 여성 의학 교육 기관이라 할 도쿄여의전에 입학할 무렵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선택한 남자들을 통틀어도 10여명에 불과한 형편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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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조차 여자가 의사가 되는 길은 결코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도쿄여의전에 다니는 조선 유학생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높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동정기사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는데 그 때마다 유학생들은 여의사로서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자부심을 내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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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길정희는 재학시절 “여의(女醫)로서 한 사람 몫이 되어 남자지지 않게 해보리라”고 기염을 토했고, 한소제는 “어떻게 하면..... 횡포무쌍한 무동정적인 남자 손에서 한푼 두푼 빌어먹지 않고 살아갈 도리가 없을까 …… 따라서 마음 깊이 무슨 직업 하나를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 도쿄여의전에 오게 됐다며 무심한 조선 남정네들의 정수리를 죽비로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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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은 이 도쿄 여의전 최초의 조선인 졸업생이었습니다. 유의할 점은 ‘최초의 여자 의사’는 아닙니다. 미국 유학 후 의사가 돼 귀국해 여성들의 질병 퇴치를 위해 노력하다 과로와 질병으로 숨졌던 김점동이 있었고, 그 외에도 정식 의학 교육 절차는 밟지 않았다 해도 3명의 조선인 여자 의사가 배출돼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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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최초의 의사고시 여성 합격자가 어디 만만한 이름이겠습니까. 타고난 머리에다가 밤잠 안자고 코피 흘려가며 이뤄낸 결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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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영숙이 일본에서 들입다 책만 파며 공부만 했느냐. 그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연애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을 규정할 때 최초의 여성 의사고시 합격자보다는 ‘아무개의 아내’로 더 흔하게, 더 무겁게 자리매김되는 인연을 엮기도 했지요. 그 특별한 인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춘원 이광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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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조선 사람들은 3대 천재로 당시 사람들은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그리고 춘원 이광수를 꼽았습니다. 육당과 벽초 역시 우리 문학사에 지우기 힘든 발자국을 남겼지만 춘원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문학평론가 김현)으로 기억됩니다. 한없이 빛나지만 그만큼 칠흑같은 그림자를 함께 짊어진 사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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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춘원 이광수는 일본내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이미 유명인사였습니다. 1919년 2.8 독립선언문의 전투적 문장, 어찌 보면 3.1 기미독립선언문보다 더 낫다는 평을 듣는 그 필치가 바로 이광수의 솜씨 아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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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논객에 문학적 재능 반짝이는 소설가에 거기다 요즘 기준으로 봐도 꽤 번듯한 미남이었으니 나이 스물 안팎의 처자들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하기엔 충분했겠지요. 거기다 고아로 자라 몸이 병약했고 폐결핵까지 걸려 있던 환자 이광수는 여성들의 모성 본능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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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를 마음에 두었던 많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열렬한 이가 허영숙이었습니다. 이광수로부터 폐병 약을 구해 줄 수 있는가 요청을 받은 그녀는 당장 약을 싸들고 이광수의 집을 찾아갑니다. 남녀유별의 가르침이 아직은 강력하게 사람들의 머리채를 쥐고 있었던 시절, 의학 공부하겠노라 혈혈단신 일본에 건너온 당찬 허영숙도 이광수의 거처 앞에서는 그예 수줍어 발 동동 구르는 갓스물 청춘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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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가 쿵쿵쿵 내려오겠지요, 어떻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그저 약과 몇 마디 말을 던지고 올라오라는 것도 못 들은 체하고 획 나왔습니다. 여자가 남자 찾아온 것이 부끄럽고 또 선생님으로 숭배하는 이를 만나니 자연 그랬습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한길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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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자 의학생의 가슴은 그렇게 뛰었던 ‘거디었습니다’. 또 허약한 폐병쟁이 문사 이광수의 가슴에도 불똥이 튀었던 ‘거디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거느린 고향의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맘 따위는 이미 현해탄에서 익사하게 되는 ‘거디었습니다.’ 그러나 이광수의 매력은 허영숙의 가슴만 뛰게 한 것은 아니었지요. 허영숙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이는 허영숙의 친구 나혜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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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결혼하기에 앞서 결혼 조건으로 자신의 죽은 옛 애인의 묘비를 세워 달라는 요구를 내걸었던 대담한 여자, 18년 연상의 최린과의 불륜으로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혜석 역시 이광수의 마음 한쪽에 자리잡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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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양다리 능력도 꽤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요일을 정해서 수 금은 나혜석 화목은 허영숙과 만나는 식으로 교통 정리(?)를 하며 더블 데이트를 즐겼던 거지요. 심지어 나혜석이 나혜석을 목매던 김우영 (후일의 남편)에게 이광수와 결혼할 것이니 나를 단념해 달라고 통고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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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위태로운 관계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진상을 파악한 허영숙은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각오로 이광수를 다그칩니다.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광수는 허영숙을 선택하지만 허영숙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광수는 나혜석더러 자신에게 미련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줄 것을 요청했고 나혜석은 다음과 같은 전갈로 이광수에게 미련이 없음을 알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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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씨를 사랑한 것은 다만 성격이 같은 점이 많다는 것 밖에는 없었소. 허씨를 나 몰래 사귀었다고 해서 실연은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정열이었으니 그것을 무슨 사랑이라 하겠소. 오직 두분의 사랑의 길에 애로 없으시기를” (나혜석의 친구 김원주의 회고록, <진리를 모릅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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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더 풀어 해석하면 이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성격이 비슷해서 좀 죽이 맞았던 것 뿐이야. 이광수가 너 만난다고 했을 때 별 느낌도 없더라고. 그러니까 둘이 잘해 봐.” 어딘지 모르게 편지 내용에서 허영숙의 독기 오른 눈매가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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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둘은 열렬한 사랑의 길로 나아갑니다. 허영숙의 회고에 따르면 유학 시절 주고받은 편지만도 1천여 통이 넘었다고 하니 알만하지요. 의학도이기 전에 자신의 남자를 지키려는 여자의 마음으로 허영숙은 폐결핵에 시달리던 이광수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후일 “당신과 살았던 생의 반 이상을 병구완만 하고 지냈다.”고 토로할만큼 병약했던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구원자와도 같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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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영숙은 사랑에 빠질지언정 사랑 때문에 길을 잃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918년 그녀가 도쿄여의전을 졸업했을 때 1년 정도 학업이 더 남아 있던 이광수는 일본에 더 머물러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허영숙은 단호했죠. “조선에 건너가서 총독부 주관 의사 고시를 봐야 해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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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우리 일상 속 유명 인사들의 사랑 이야기.....
<사랑 도 발명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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