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 긴급동의 - 독도 폭격 사건

in #zzan7 years ago

1948년 6월 14일 제헌국회의 긴급동의 제출

5.10 총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여러 모로 어수선했다. 북한을 배제한 남한 단독 선거로 이뤄지긴 했지만 시작부터 200석의 의석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4.3 봉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제주도는 할당된 국회의원 2명을 보내오지 못했던 것이다. 국회의장으로는 이승만이 뽑혔고 5월 31일 첫 업무를 시작하는데 이승만은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 국회의 서막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열자고 제안하는 등 뭔가 어색하고 엉성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회가 출범한지 겨우 2주일만에 ‘긴급동의’가 제출되는 일이 벌어진다.

긴급동의의 내용은 ‘독도 폭격’에 관한 것이었다. 6월 8일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우리 어선들을 폭격하고 기총 소사를 가하여 무수한 목숨이 희생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국회에서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다수결로 외무국방위원회로 넘긴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외무국방위원회가 이 일을 어떻게 처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즉 흐지부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코 흐지부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대체 독도 인근 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6월 8일 강원도와 울릉도에서 온 고깃배들이 독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독도로 접근을 하더니, 갑자기 독도 위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뒤이어 독도 주변 수역에서 조업하고 있던 선박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며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폭격이었다. 배 위에 있던 이들은 바다로 뛰어들고, 독도에 상륙해 있던 어민들은 동굴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손짓을 해 보았지만, 폭격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곳 저곳에서 어민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4차례에 걸친 폭격이 있은 후 한 대의 비행기가 와서 한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6월 11일 첫 보도가 이뤄졌고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대체 어느 나라의 비행기이냐. 하지만 사실은 뻔한 질문이었다. 독도에까지 비행기 몰고 와서 폭탄을 퍼부을 군대가 미군이 아니고 또 누구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미군 당국은 처음에는 미군기에 의한 폭격을 부인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오끼나와 기지에서 발진한 93 폭격기 대대의 행동임을 인정했지만, 이는 선박과 바위를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우겼다.

“폭격 30분 전에 정찰기를 보내어 상황을 확인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약 7,000m의 고공에서 연습탄을 투하했던 바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것이 미군 해명의 골자였지만 어민들과 경찰의 말은 달랐다. 어민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사선을 헤매게 만들었던 비행기에서 미국 공군의 표지인 '원과 별'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거기다 이구동성으로 토로했던 바 기총사격까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7000 미터에서 떨어진 ‘연습탄’일 수 없었다. 즉 하늘이 높게 올라봐야 1000미터 상공, 또는 더 낮은 고도에서 이뤄진 일이라는 반증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선들과 어민을 바위나 바위 위의 물개로 착각했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의 거짓말이 된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14척의 배가 침몰하고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과 언론의 보도는 저마다 달라서 사망자 수가 수백명 선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미 군정청은 사건에 대한 보상을 대부분 완료했다고 짤막하게 코멘트 한 후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이때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코멘트는 참으로 교만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현지 유가족들은 하지 중장의 조속한 처결에 감격해하고 있으며, 살아온 사람들도 감사히 여길 뿐이지, 하등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동 사건이 완전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음을 누구보다 피해자 본인들이 더 인정하고 있다 한다.” 사람이 수십 명이 죽고 다쳤는데 무슨 처결이 얼마나 조속했길래 그 피해자들이 ‘감격’씩이나 하며, 동료들의 몸이 걸레짝이 되어 죽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감사’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아온 것에 감사하라는 충고였을까.

‘조속한 처결’ 역시 유족이나 당사자들이 감동할만한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고 전한다. 독도 수비대장으로 유명한 홍순칠의 증언에 따르면 "대국으로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요크셔 돼지 한 마리 값"으로 보상을 대신했다고 하며, 한 푼도 받지 못한 희생자나 부상자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스테리는 더 있었다. 오끼나와에서 뜬 비행기가 무엇하러 독도까지 날아와서 폭격을 퍼부었을까. 독도라는 존재를 미군에게 알린 것은 누구였으며 폭격 장소로 추천한 것은 누구였을까. 그 막후 조종자가 일본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은 독도를 미군의 폭격장으로 만듬으로써 독도를 한국령에서 배제한 일종의 무인 중립지대로 몰아가 “한국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가.”(국제법학자 홍성근) 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국회에서도 일본 의원이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외무성 관리의 대답은 이러했었다. “대체로 그런 발상으로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 내막이 어떠하였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2015년 바다에서 발견된 위령비

정부 수립 이전 제헌국회의 긴급동의도 헛되이 독도 폭격 사건은 건국과 전쟁의 소용돌이 와중에 수중으로 가라앉고 만다. 2년 뒤 1950년 경북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독도 폭격 희생자 위령제가 열리고 위령비가 독도에 세워졌으나 1953년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하며 난입한 일본 어민들에 의해 파괴된 채 내팽개쳐지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지금도 우리는 60여년 전 고기잡이를 하다가 불벼락을 맞고 죽어간 사람들의 정확한 수와 이름을 모른다.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6월 14일 긴급동의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Sort:  

위령비는 다시 세워졌나요? 아직도 해결된게 없다하니
참으로 애통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1
BTC 61264.97
ETH 1593.01
USDT 1.00
SBD 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