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정권의 불꽃 , 에멀린 팽크허스트
1928년 6월 14일 여성 참정권의 불꽃 사위다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에게 주어지는 선거권이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권리다. 선거의 의미와 가치를 떠나서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시민은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이며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또 그 권리는 성별과 재산의 유무와 종교와 피부색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접적으로 행사되고, 그 투표의 내용...은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권리는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손오공처럼 바위산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니다. “투표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다. 투표하러 가는 자체가 죽을 죄일 수 있었던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 투표라는 것을 구경조차 못해 봤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그리고 정작 세계를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에서. 한창 대영제국의 끗발을 날리던 1884년 투표권을 보유한 이는 전체 성인의 28.5 퍼센트에 불과했다. 183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이나 기타 피맺힌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이어졌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그 28.5퍼센트의 ‘성인’은 죄다 남자였다. 여자에게는 아예 투표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한 인물이 우뚝 솟아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라는 여인이다. 미국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는(또는 그렇게 비쳐졌던)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그를 위해 모금운동까지 벌인 행동파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파리의 기숙학교에서 파리 꼬뮨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평생 독일과 관계된 것을 미워했던 이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에멀린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여성의 종속’ 등 저서를 통해 여성의 예속을 비판했던 J.S 밀의 친구였던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면서 팽크허스트라는 성을 얻는다.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녀는 남편의 정치 활동을 외조하면서 현실에 눈을 떴는데 남편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잠자고 있던 저항의 영혼을 일깨웠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참고 있는 거요? 왜 남자의 눈을 손으로 할퀴면서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거요?” 이런 말들은 잠자고 있던 암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행위와 같았다. 에멀린은 점차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세력의 지도자로 성장해 간다. 남편이 죽은 뒤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랑하던 맏딸 크리스터벨과 함께 여성 참정권 쟁취 대오에 뛰어든다.
1903년 에멀린은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창설한다. WSPU. 이 이름은 기억해 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그 패러다임부터 조금 달랐다. 이전의 운동단체가 이미 선거권을 가진 남성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는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정도의 “우리도 이만큼은 주세요”가 아니라 모든 여성의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요즘 한국 말로 하면 “닥치고 투표권!”을 내세운데다가 이전의 서명운동이나 청원같은 방식에서 벗어나 ‘전투적인’ 방식을 서슴없이 사용한 것이다.
1911년 정부가 “재산이 있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을 때 에멀린과 그 동지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1912년 3월 1일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여성들은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영국 피카딜리 광장 등 중심가의 모든 상점과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버킹검 궁전 난간에 몸을 묶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미친’ 여성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 개탄하는 이들에게 던진 에멀린의 한 마디. “.....정부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산권이다. 우리는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적을 분쇄하고자 한다.”
“폭력시위를 엄단하여 공공의 안정을 지키는” 것은 동서고금 정부의 공통된 수사, 정부는 당연히 수백 명의 여성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는 그 입을 벌리고 강제로 음식물을 흘려넣는 강제 급식을 실시했고,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지면 풀어줬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잡아넣는 법까지 만들었다. 옥스퍼드 출신의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한창 진행되던 경마장에 들어가 국왕 소유의 말을 막아서고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 부르짖다가 밟혀 죽은 것은 그 모든 부당한 억압과 질곡에 대한 저항의 절정이었다.
심지어 귀족 여성들이 노동자 복장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몸을 상하는 일도 있었다. 쉰을 훌쩍 넘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 투쟁의 중심에 있었고 열 두 번이나 되는 단식투쟁을 벌이며 ”Vote for Woman!"을 부르짖었다.
“우리들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 난리굿판을 치르고, 또 전쟁까지 겪은 후에야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 그리고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진다. 가만 이상하다. 왜 30세일까. 이유는 “전쟁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여성 유권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즉 멍청한 여자 유권자가 더 많아지면 곤란하다는 속셈이었다. 영국 남성들의 유전자는 한국 남성들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지. 하긴 어느 나라 남자는 그렇지 않았겠냐마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조건의 보통선거가 실시된 것은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였다. 그 지난한 세월의 결실이 맺어지기 직전, 1928년 6월 14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얻는 교훈은 한 가지다. 세상에서 거저 얻어지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공짜로 이뤄지는 진보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남편 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말대로 “눈이라도 할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질주하는 말의 말고삐를 잡아채고 외치려는 노력이 없고서는 주어질 수 없던 권리였다. 어디 여성참정권 뿐이랴. 우리들이 물처럼 마시고 공기처럼 들이키는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찾아야 할 오아시스였고 화생방 훈련 후에 들이마시는 바깥 공기였던 것을.,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요즘의 탈코르셋을 외치는 이상한 페미입네 하는 사람들 때문에 여성운동이 폄하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상한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우리 사회를 진보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개마초'로 비난받는 처지라 뭐 할 말은 없습니다만.
여성의 권리를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프라이버시, 물론 위대한 여성
네.. 역사는 이런 분들의 분투를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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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