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별들을 위하여 4.약사 고미애
기억해야 할 별들을 위하여 4
낮은곳을 향해 달려간 약사고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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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들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몸부림치다가 숨져간 현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근처의 남영동 대공분실이야. 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본의 아니게 바라보며 등교해야 했던 대학생들이 있었어.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이었지. 또래 대학생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장을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학생들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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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숙명여대에는 분노를 담아낼 만한 학생운동 조직이 변변치 않았어. 총학생회가 꾸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과대학 학생회가 없는 곳도 있었으니까. 그중 하나가 약학대학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약학대학은 고등학교 때 탁월한 성적을 올린 모범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곳이었고 학습량도 많다 보니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두기 힘들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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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의 뜨거운 물결은 데모의 무풍지대라 할 약학대학에도 몰려왔어. 뭘 하려면 대표가 있어야 했지. 그때 자신이 그 일을 맡겠노라며 나선 사람이 있었어. 당시 4학년이었던 고미애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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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집안의 딸이었고 데모 같은 것에 눈 돌린 적도 없는, 그저 공부 열심히 하고 약사의 꿈을 실현해가던 평범한 약대생이었다. 1987년 한국 현대사는 그녀의 어깨에 상상해본 적 없는 짐을 얹었고 깡마른 체구의 여학생은 그 짐을 옹골차게 짊어졌어. 교수들이 나서서 도대체 왜 이러느냐고 말려도, 아버지가 붙잡고 호소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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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국민대회가 열렸고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가 최루탄으로 뒤덮인 가운데 숙명여대 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전교생 6000명인 학교에서 무려 4000명이 모여들었다. 약학대학 학생회장 고미애는 6월 내내 그 대열의 선두에 있었고,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연세대생 이한열의 병상을 지키겠다고 병원 복도에서 새우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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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1987년 6월 전국 곳곳의 거리를 바다처럼 뒤덮었던 여느 학생과 다를 것이 없었을 거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공부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니까 말이다. 고미애는 달랐어.
“내가 무대에 오른 음악회 때 미애가 왔는데 내게만 꽃다발이 없는 걸 알고는 수십 분을 걸어 나가서 꽃다발을 사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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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대학 학생회장으로서 1987년 6월을 함께했던 최도은의 회고야. 그렇듯 사람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유별났고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고자 열의를 내게 된 고미애는 졸업 후에도 그 길을 이어간단다. 목 좋은 거리의 번듯한 약국이 아니라 어두컴컴하고 사람들 발길도 뜸한 뒷골목 약국의 약사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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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도 없고 살아본 적도 없는 곳, 가난함과 고단함이 넘치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부천시 여월동이었지. 그의 결의는 이랬다는구나. “가진 자만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없는 자들은 약 한번 제대로 못 사먹는 벽을 허물 것이다(<부천매일> 2018년 3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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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애는 그 몸이 열 개나 되는 듯 분주하게 일했다고 해. 아람약국에서 14시간 동안 일하는 약사이면서, 맞벌이 부모가 많아 방치된 아이들을 위한 새롬공부방의 ‘꽃사슴 선생님’이었고, 부천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이었으며,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상담실장이었고,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지역분과장이었다. 부천에서 일이 끝나면 성남까지 달려가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니 이걸 초인적인 성실함이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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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늘 유행과 상관없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그 작은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항상 빈틈없이 정확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냈다(지성수 목사, 당시 부천주거연합 의장).” 자기 몸만 혹사한 게 아니라 고미애는 자기 ‘몫’에도 냉혹했단다. 20만원을 제외한 수입 전부를 자신이 활동하던 공간과 조직을 위해 써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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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여러 해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어. 어느 날, 그는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올가을에는 결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지 싶어. (···) 10월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약국에 변화가 있을 거고, 이 역시도 내게 부담을 주는 문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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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해 가을에는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던 모양이지. 필시 실망할 애인을 위해서 스물여덟의 젊은이는 덧붙였어. “휴가 때 안 졸 테니까 걱정 말고, 얘기 많이 나누자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고미애 약사는 데이트하다 꾸벅꾸벅 졸기도 했나 봐. 하지만 그에게 가을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어. 1992년 2월5일 설 연휴, 약국을 지키던 도중 외국인 노동자가 휘두른 폭력에 쓰러지고 말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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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치료도 헛되이 그가 2월11일 세상을 떠났을 때 빈소에 모인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란다. 눈물바람을 하고 땅을 치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고 물었던 거야. “고미애씨가 거기서도 일했어?” “미애가 그 단체와도 관련이 있나요?” 사람들은 의아해하다가 이제 세상에 없는 한 여성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를 깨닫고 다시 한번 허리를 꺾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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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고미애 약사의 장례를 주관하지 못했어. 귀하게 기른 딸이 그렇게 처참하게 세상을 떴으니 유족들이 ‘부천 사람들’을 기꺼워할 리 없었지. 그저 약국 앞에서 치른 노제가 고인과의 마지막 이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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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에서 고인의 대학 동기였던 최도은은 고인이 즐겨 불렀던 ‘너를 부르마’라는 노래를 목 놓아 불렀어.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여 시궁창에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부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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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기 삶에만 신경 썼다면 지금 여유 있는 ‘586’이 되었을 약사 고미애는 시궁창 같은 세상을 좀 더 맑게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이 다가서고자 했던 외국인 노동자의 폭력에 쓰러지고 말았어. 그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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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애처럼 그렇게 못한다.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나. 어쩌면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 하러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너무 억울하다. 미애가 돕고 싶어 했던 약자들, 외국인 노동자한테 죽임을 당했잖나. 난 아직도 그 동네에 못 들어간다(이규화, 당시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라는 토로가 당연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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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이기고 그가 하려던 일을 잇고자 한, 그래서 ‘고미애의 이름’을 부르고자 한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터전이었던 부천에 새 역사를 일군다. “그의 생전 발자취대로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체류자에게 인도적 지원을 해서 고 약사의 죽음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약사들 사이에서 활발히 전개(서영석 약사)”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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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돌아간 3년 뒤인 1995년에는 ‘부천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설립된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란 사실 역사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울지도 몰라. 사람이 그 가벼움을 넘어서고자 할 때, 자신의 가벼움을 보태 의미 있는 힘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 역사는 그 사람의 무게를 인식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역사는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단다. 젊은 약사 고미애의 삶과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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