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시골 전도사의 독립만세

in #kr8 years ago

3.1절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 국경일 가운데 이 날이 가장 의미 깊고 경축해야 할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3.1절 포스팅 올립니다...... 내일 한 두 개 더 올릴 것 같습니다..... 우선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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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정재용의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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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정오를 얼마 앞둔 파고다공원. 고종 황제의 인산을 맞아 흰옷 입은 노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 공원 안은 한산했다. 어둡고 슬픈 공기만이 공원을 내리누르고 있었고 그 외의 어떤 분위기도 살필 수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공원을 초조히 오가던 나이 서른셋의 청년은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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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영감탱이들 같으니.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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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투덜거리는 혼잣말에는 황해도 말투가 배어 있었다. 그는 해주 사람으로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재용이었다. 그는 2주 전쯤 서울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보고 온몸이 떨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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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 날짜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 정오. 재정은 천도교가 대고 인원 동원은 기독교가 맡소. 때맞춰 상경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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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때가 왔구나. 고종 황제 인산을 핑계로 해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정재용은 경신학교 시절 음악 강사 김인식이 가르쳐 주던 ‘애국가’ 가사를 기억을 짜내며 입안에서 혀를 오물거렸다. 외국민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춘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 노래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끌려가 ‘풍기문란’ 혐의로 감옥살이를 했던 김인식의 얼굴도 스쳐갔다. 나라가 망했다고 통곡이 진동한 지 근 10년. 이제야 조선 독립의 성聲이 터지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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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독립선언문은 천도교 계열 출판사에서 인쇄했고 각 지방의 교회로 독립선언서가 보내졌다. 2월 28일 아침 미처 원산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고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김창준의 부탁으로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가 경원선 열차에 올라타는 전도사 곽명리에게 선언서를 쥐어줄 때만 해도 다음 날이면 이 모든 긴장이 시원스럽게 터져 나올 줄 알았다. 3월 1일 정오.

“전쟁을 안방에 앉아서 할 건가”

그런데 파고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와 머리를 맞댔던 YMCA의 박희도, 원산 가는 전도사에게 독립선언서를 갖다 주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김창준을 비롯하여 서른 세 명이라는 민족 대표는 파고다 공원 어디에도 없었다. 전해들은 이유는 좀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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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고종께서 슬픈 운명으로 승하하시어 며칠 후면 인산 날이라 백성들의 심리가 극도에 달해 있는 이때에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과 군중이 일심하여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행진하여 나가게 될 것이고, 그들은 또 전국에서 인산에 참가하기 위하여 올라온 수많은 시민들과 합세하게 된다면 유혈이 극심하게 될 터이니, 이를 염려” 하여 독립선언을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태화관 식당에서 한다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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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원. 전쟁을 안방에서 하겠다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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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절호의 기회에 대표라는 사람들이 유혈충돌을 저어한다는 것인가. 그럼 일본이 독립선언에 감동하여 고분고분 ‘아 그렇스무니까 우리는 물러가겠스무니다’라고 해주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지난 2주간의 그 긴박한 준비와 죽음을 불사한 각오가 식당 특실에서 펼쳐지는 꼴이라니. 다윗이 팔매를 들고 골리앗에 나서는 게 아니라 자기 양을 향해 네가 골리앗이라고 선포하는 물색 아닌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들을 원망하며 애꿎은 돌부리를 차던 그의 눈앞에 거짓말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2시가 가까워오자 어디선지 검은 옷의 학생들이 무더기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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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란 두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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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동원을 담당했던 연희학교 김원벽과 보성학교 강기덕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파고다 공원 경내는 수천 명의 학생들로 들끓었다. 고종황제의 인산 날을 앞두고 인파가 모이는 것을 당연시한 방심일 수도 있었겠지만 일제 경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인파의 집결이었다. 불쏘시개는 마련됐고 사람들 마음에 기름은 이미 부어져 있었다. 다만 그 불을 댕길 불씨가 태화관 식당 방 안에서 작게 켜졌다가 꺼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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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재용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종이 한 장이 퍼뜩 떠올라 온다. 천도교인들이 인쇄해 줬던 독립선언서. 행여 일제 경찰에 발각될까 옷 깊숙이 숨겨둔 빽빽하게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 순간 많은 것이 스쳐갔다.
“내처 내가 읽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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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민족대표들이라는 이들이 유혈을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행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입장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셈인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학생 대표 강기덕도 김원벽도 잠자코 있는데 내가 나서도 될까. 정재용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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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상단에 찍힌 두 글자, 독獨과 립立이 불화살처럼 그의 눈을 찔러 왔다. 왈칵.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왔고 가슴에서는 10년을 쌓아온 가래가 불덩이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마침내 정재용은 오랫동안 금기였던 두 단어를 입 밖에 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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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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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언서. 이 단어를 내뱉기는 더할 수 없이 힘들었으나 이 말이 파고다 공원의 창공을 가르는 순간 수천 명의 가슴을 번갯불처럼 내리쳐 찢어 놓았다. 아! 곳곳에서 탄성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퍼져 나왔고 그 잡음들을 내리 누르며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시작됐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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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독립만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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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고다 공원 안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정재용의 떨리는 육성뿐이었다. 처음에는 가늘던 정재용의 목소리는 점차 우렁차게 수천 명의 귀에 꽂혔다. 정재용이 평생에 잊지 못할 낭독을 마쳤을 때 군중은 일순 침묵했지만 한편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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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 만세!”

눈물로 외친 “조선 독립 만세”

누군가 온몸을 활처럼 꺾으며 두 팔을 하늘로 솟구치며 부른 만세였다. 한 마디에 눈물이 솟았고 만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뜻 모를 괴성이 터졌다. 아아아……. 으아아……. 그리고 이어진 합창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이 심경은 당시에 유행했다는 노래 가사에 그대로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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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성. 십 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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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민족기록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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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정재용이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립선언서를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최악의 경우 3․1항쟁은 늙다리 몽상가와 얼치기 기독교인들이 자칭 민족대표랍시고 음모를 꾸몄다가 겁이 나서 태화관 식당에서 만세 부르다가 잡혀간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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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표정으로 모여든 수천 명의 학생들도 “에이 어떤 놈이 이런…….” 하면서 강기덕과 김원벽을 타박하며 덕수궁 앞에 나가 곡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 시골 교회 전도사 정재용이 있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 중의 하나인 3월 1일은 천고의 빛을 얻는다. 그렇게 역사는 평범한 사람에게 운명의 반지를 끼워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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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용은 이 일로 1919년 8월 체포돼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출옥한 뒤에도 ‘의용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기록된 그의 흔적은 뜻밖에도 번화한(?) 곳에 남아 있다. 주말만 되면 수천 명의 등산객들이 등에 코를 붙이고 오르는 북한산 백운대가 그곳이다. 가로 1.2m, 세로 3m 크기에 전체 총69자. 바위 바닥 네 귀퉁이에 '경천애인(敬天愛人)' 네 자를 새긴 안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만세를 앞장서 불렀다‘ 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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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경천애인‘은 천도교의 주요 이념이다. 개신교 전도사였던 그가 왜 그렇게 새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을 기미년 3월 1일 가장 미더웠던 동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까 제멋대로 추정해 본다. 그가 이 글을 새긴 것은 3.1항쟁 직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과 끌 짊어지고 헉헉거리며 백운대에 올라 정성들여 쓰고 공들여 쪼아 글을 새긴 후 경성 시내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한 번 그는 목이 찢어져라 외치지 않았을까.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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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암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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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 졸저 <한국사를 지켜라 > 1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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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지켜라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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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절을 맞아 뜻깊은 유래를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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