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산사람 2 - 2
그렇게 보름쯤 지나서일까. 그날 아침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잠을 깼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고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깊은 갈증이 시작되었었던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난 그때 괴물의 존재를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손등의 긁힌 상처와 찢긴 소매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손바닥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뒤뜰 옹달샘 옆 작은 거울 쪽으로 뛰어갔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이미 말라버린 핏자국으로 범벅이었다. 손과 얼굴을 씻다가 갑자기 뭔가 북받쳐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과 얼굴과 찢어진 옷이 자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괴물은 인간으로 돌아왔다고 착각한 나를 조용히 꾸짖은 것이었다. 난 손을 짚고 일어서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뒤뜰 구석 담장 밑에 멧돼지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목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이 멀리서도 뚜렷했다.
난 뒤통수를 세차게 맞은 듯한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렸다. 그리고 간신히 툇마루에 올라앉아서 먼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던 희망이 끊어졌다. 인간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올라온 낭떠러지에서 다시 떠밀려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멧돼지를 뒤뜰에 묻어 주었다.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멧돼지를 여기까지 가져다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이 아님을 자각하라는 의미일까,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의미일까. 어느 쪽이든 나에게 주어진 길이 인간의 길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정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난 완전한 괴물은 아니었다.
그 후로 괴물의 산짐승 사냥은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멧돼지며 노루며 고라니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묻었다. 괴물은 긁히고 할퀸 상처가 아물고 나면 사냥에 나가곤 했다. 그래서 내 몸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이 상처는 배설물로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의 행위와 같았다. 너는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몸에 새기는 것이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사실 괴물의 편이었다.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괴물은 내가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자포자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 자유의지로 인간의 알맹이를 솎아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그놈은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고 기다릴 것 같았다. 나를 향한 괴물의 기다림이 의외로 빨리 끝날 뻔했던 일은 이곳에 자리 잡은 1년쯤 후에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외출조차 자유롭지 않은, 혼자 사는 인간이란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허약한 모래성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지루함에 실린 미약이 인간의 의지를 끊임없이 시험했다. 가을과 겨울과 봄이 한 번씩 지났지만, 그 일상의 변화는 너무 더뎠다. 나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어쩌다 비나 눈이 온종일 내리는 날에는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평소와 다른 그 일상에 심취했다. 나의 일과는 엿가락처럼 기다랗게 늘어뜨린 시간 위를 끈적거리는 발바닥으로 힘겹게 뗏다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다. 언제나 내 하루의 끝은 끝나지 않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한 하루가 지나면 똑같이 지루한 하루가 기다릴 뿐이었다.
지한은 쓰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때를 생각하면 서늘하고 저릿한 느낌이 손끝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전해졌다. 목이 부러진 채 내팽개쳐진 시체의 동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지한의 펜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완전히 다른 아침을 맞았다. 몸 구석구석에서 어떤 호르몬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깼다. 잠을 깨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눈을 반쯤 감은 몽롱한 상태가 지속됐다. 마약에 취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서 미세한 공기 흐름에도 피부가 파도를 타는 듯 출렁거렸다. 멀리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가 사과 씹는 듯 가까이서 서걱거렸다. 소파에 누워있던 난 소파와 일체가 되어 먼지처럼 떠다녔다. 공중에 산개한 의식이 소래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한참을 무엇인가에 도취하여 있다가 콧잔등을 내내 맴돌고 있던 달콤한 향기의 정체를 짐작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침나절이 다 지나고 있었다. 이 달콤한 향은 익숙한 것이었다. 이 향수의 유일한 재료가 인간의 두려움이라는 걸 확실하게 기억해내자 난 방을 뛰쳐나와 한달음에 뒤뜰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죽은 산짐승이 있곤 했던 자리에 찢긴 등산복을 걸친 시체가 놓여있었다. 난 급하게 샘으로 달려가 얼굴과 손의 핏자국을 없앴다. 그리고는 옷을 다 벗고 몸에 묻은 때와 먼지를 문질러 닦아냈다. 씻어낸다는 행위로 면죄부라도 받을 것처럼 피부가 벌겇게 달아오를 때까지 문지르고 문질렀다.
그는 심마니처럼 보였다. 배낭은 산속 어딘가에 버려져 있겠지. 그의 주머니에 손바닥만 한 약초 몇 뿌리가 있었고 손톱 사이에 검정 때가 잔뜩 껴 있었다. 핏기없는 시퍼런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허망함과 두려움을 섞은 눈빛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의 눈을 감겨주고 비틀린 목을 제자리로 맞춘 뒤 산짐승들을 묻던 자리 옆에 구덩이를 파서 눕혔다. 시체에는 달콤한 잔향이 남아있었다. 살인했다는 죄의식으로 가슴이 폭발할 것처럼 괴로운데 시체의 달곰한 향기는 나를 이율배반의 구렁텅이로 밀어버렸다.
계속...
지한이는 완전히 괴물의 숙주가 되어 버렸네요.
여기에서 벗어나는 건 죽음 뿐인건가.. ㅠ.ㅠ
댓글 쓰려다 다운보팅을.. 재빠르게 업보팅까지... 제 의지가 아니었으니 부디 모른척...
모른척이 아니라 몰랐어요. ㅋ
몰랐으니 계속 모르겠습니다. ^^
저도 그런적 많아요. 팔로우 하려다가 차단하고 차단풀고 팔로우하고 사과하고 ㅋ
아... 본성을 버리지는 못했네요
뱀파가 생각보다 강력...ㅎㅎ
얼마나 괴로울까...
괴로운걸 더 잘 표현해야하는데 한계네요..
읽지 않은 걸로^^
아지 두편 남았는데 그냥 스킵 하시는걸로..ㅋㅋ
헐..
이제 완전한 뱀파의 길을...ㅋ
아마 본격적이려다가 끝날듯 함다..
지한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건지 무척 궁금해 집니다.
허무해지실거에욥..
더 궁금해 지는데요.... 꿈인가?? ㅎㅎㅎ
더이상 희망이 없네요.
지한은 어디까지 갈것인지 소름이 돈네요~~!!!
지한이 희망이 없어보이긴 합니다.
산짐승이 아닌 사람을...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에 손을 대는건가요?
나름 뱀파이어니까 그냥 넘어가기도 그렇고 해서요..ㅎㅎ
지한이의 고통이.. 사람을;; 시작되었군요
시작은 되었지만 끝날 때도 머지 않았습니다.ㅎㅎ
계속되어야 합니당~!
감사합니당~ ^^
'스파'시바(Спасибо스빠씨-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