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인가?

in #christianity7 years ago

우리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유통하는 단어가 예배이다. 우리네 교회처럼 예배를 많이 드리는 나라도 없다. 일주일에 열 번도 넘는 예배가 드려진다. 새벽기도회에서도 예배의식을 진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까지 생산하고 있다. 예배에 성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바로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신은 예배에 성공한 대가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계신가? 지금까지 수백 번 아니 천 번이 넘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도 고단하고 팍팍하게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배자에 대해 곱씹어 보고 싶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1~24)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단하고 팍팍하게 사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너무 무더워서 아무도 물을 길러 오지 않은 한낮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다. 아시다시피 그녀의 남편은 이미 5명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갈아치울 만큼 삶에 만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혹시 바람기가 많은 음탕한 여자일거라고 속단하기 쉬우나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제권은 남자에게만 주어졌다. 생계를 보장해주는 땅은 오직 남자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 그래서 출가하기 전의 여자들은 아버지에게, 출가하고 나서는 남편,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의 봉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남편들은 아내가 맘에 안 들면 이혼장만 써주고 쫓아내기 일쑤였다. 아마 이 여인도 남편에게 쫓겨나서 생계를 보장해줄 남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 얻은 남자들도 전 남편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치우는 기막힌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삶을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피해서,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서, 그녀는 우물가에서 한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그 남자는 그녀에게 평생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는 제안을 던지고, 그녀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는 이 남자가 심상찮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 본 남자가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궤적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차린 그녀는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고민을 털어놓는다. 바로 예배장소에 대한 질문이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민족간의 혼혈민족으로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은 인정하고 신12장의 축복을 선포한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온산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각자 서로 자신들의 예배장소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떤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자신의 고단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게 될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예수님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참된 예배자의 조건으로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콕 집어서 말씀하고 계시다.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건물에서 드려지는 특정한 예배의식에 참관자로 앉아있기만 하면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주일 오전에 드려지는 예배의식에 빠지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정한 시간대에 드려지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예배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배는 히브리어 עֹבֵ֥ד(아바드), 헬라어 προσκυνἐῶ(프로스퀴네오)이며 영어로는 worship이라고 말한다. 예배라는 뜻은 문자적으로, ‘절하다, 존경을 나타내다, 가치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돌리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경건과 의식을 포함하는 존경하는 삶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기록의 초기단계에서 예배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제사가 드려지고(창4:34), 의식의 기본 형식들이 제정되었다.(창8:20~22) 모세는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갈 요청이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희생제사를 들었다.(출5:1~2) 이스라엘의 종교의식(宗敎儀式)은 출애굽에 의해 심화되었고 여러 사건을 통해 유래되었다. 왕정시대의 의식력(儀式曆)은 주요한 세절기의 농사축제인 유월절과 오순절, 장막절을 지키는 데 집중되었다. 이 예배의 구성요소는 다양하고 풍부하였다. 기악과 성악, 찬양, 춤, 제물, 십일조, 설교, 간구, 기도, 맹세, 식사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 이후에는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백성의 추방으로 인해 각 지방에서의 회당예배가 등장했는데, 희생을 강조한 성전예배와는 달리 회당예배의 특징은 율법을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예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초기 기독교 예배는 세례나 가르침, 성만찬 중심으로 드려지다가, 유대교의 예배의식을 들여와 공적 기도, 시편낭독, 가르침, 개인의 헌신 등의 요소를 포함되었다. 유대인의 예배의식에서 대부분을 빌려왔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성전의 희생제사를 없앤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예배에 대한 역사적인 흐름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예배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위의 로마서 12장에서 ‘예배’를 언급하는 단어는 ‘제사’를 뜻하는 헬라어 ‘라트레이아’를 번역하였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정한 제사의식으로, 소나 양을 잡아 번제로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지만, 신약시대에는 우리 스스로가 산 제물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결국 피조물인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는 제사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더 이상 율법에서 정한 제사법이 무의미해짐에 따라 스스로가 제물이 되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삶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이 신약시대의 예배의식으로 대체된 감이 없지 않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세속적인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고 삶에 적용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특정한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만을 보시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일상의 삶에서 어떤 태도와 목적, 동기, 속내를 가지고 살아가느냐를 보시고 싶어 하신다. 즉 하나님은 교회에 와서 예배행위를 드리는 행위이전에 평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통해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교회에 오면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평소의 삶의 현장에서는 크리스천인지 구별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평일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탐욕적이고 방탕한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교회의 예배시간에 경건한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겠는가? 많은 예물을 드려도 관심조차 없으실 터이요, 아무리 자주 교회를 찾는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악한 이스라엘백성이 드린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으며 헛된 제물도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사1:11,13) 성전을 자주 찾아 제사를 드리는 행위조차도 가증스럽게 여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사1:12)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원칙은 변함이 없다. 정중하게 차려입고 많은 헌금을 드리며 경건한 모습으로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여하고 있어도 평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가증스러울 뿐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외식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아들이시는 예배는 규정된 의식(儀式)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예배자의 올바른 자세와 거룩한 성품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고 호되게 꾸짖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한 자세에 종지부를 찍는 말씀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은 ‘엔 푸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이며, 영어로는 ‘in spirit and truth’이다. 먼저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영혼을 다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다른 표현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특정한 의식에 참석하여 참관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영으로 드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성령께서는 필자에게, 예배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 예배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일상의 삶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진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하나님의 영이자 성령이 다스리고 계시며, 우리 안에 그분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며 다스리시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5~8)

그렇다면 당신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참된 예배자의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생수의 강이 당신의 영혼과 삶에 넘쳐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로서 죄가 정결하게 씻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며 구원을 얻으며, 성령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성령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천국의 자격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악한 종이 되어 유황불이 활활 타는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건조하고 냉랭하며 삶이 고단하고 팍팍한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아닌 까닭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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