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부 4

in Book it Suda5 years ago

블라우스를 입고, 언제가는 숱도 많고 아름다웠겠지만 이제는 듬성한 머리 갈래를 목덜미에서 핀으로 고정시키고, 지치고 여윈 얼굴 때문에 크고 튀어나와 보이는, 겁먹은 눈을 한 돌리가 물건들로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 서서 서랍장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남편의 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문을 쳐다보면서 손길을 멈췄다. 그녀는 엄숙하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자신이 남편을, 그리고 그와의 대면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사흘간 벌써 열 번이나 시도했던 걸 마침내 하던 참이었다. 그건 바로 친정으로 가기 위해 아이들과 자기 물건을 챙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냥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다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남편을 벌하고 욕을 보이고, 자신이 받은 고통의 일부만이라도 갚아주어야 한다고 되뇌는 것이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를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습관, 또 그를 사랑하는 습관을 이제 와서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이 집에서도 다섯 아이들을 겨우 건사하는데 아이들을 다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면 형편은 더욱 나빠질 뿐이라는 사실 역시 그녀는 감지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쉰 수프 탓에 막내가 병이 났고, 다른 아이들도 어제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다. 떠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기만하면서 어쨌든 물건을 챙겼고 떠날 것처럼 행동했다.
남편을 보자 그녀는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손을 서랍장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엄하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얼굴에 어쩔 수 없이 고통이 들어났다.
“돌리!” 그가 작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애처롭고 유순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싱싱하고 건강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싱싱함과 건강함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래, 행복하고 흡족한 모습이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난 뭐람, 이이의 선량함,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칭찬해 마지않는 선량함이 역겹다. 난 그의 선량함이 가증스러워.’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입이 오므라들고, 창백하고 떨리는 얼굴의 오른편 뺨이 실룩댔다.
“왜 왔어요?” 그녀가 보통 때와는 다른 먹먹한 목소리로 재빨리 물었다.
“돌리!” 그는 다시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안나가 오늘 온다는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난 아가씨를 맞을 수 없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렇지만 돌리…….”
“나가요, 나가요. 나가라고요!” 남편을 보지 않으면서 그녀가 소리쳤다. 그 외침은 마치 육체의 고통을 내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오블론스키는 아내를 생각할 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트베이 표현대로, 모든 것이 ‘알아서 풀리겠거니’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연히 신문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고통에 차서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체념과 비탄에 잠긴 목소리를 들으니, 숨이 멎고 무언가 목젖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으며 눈에는 눈물이 비쳤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돌리! 제발! 정말이지…….” 울음이 목에 걸려 그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랍장을 쾅 닫고서야 그를 바라보았다.
“돌리,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만 들어줘. 용서해 줘. 용서해 줘……. 생각해 봐. 구 년 세월이 그 순간을 보상할 수 없다는 말이오? 그 순간을?”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이 다음에 뭐라고 할지 기대하며 듣고 있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녀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 같았다.
“매혹당한 순간…….” 그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순간 육체의 고통을 느끼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다시 꽉 오므라들고 얼굴 오른쪽 뺨의 근육도 다시금 경련을 일으켰다.
“나가요, 여기서 나가요!” 그녀가 한층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매혹당했네 어쨌네, 당신의 비열한 짓에 대해서라면 얘기도 꺼내지 마요!”
그녀는 방을 나가려 했지만 휘청하더니 몸을 기대기 위해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커지고, 입술은 부풀어 오르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돌리!” 그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발, 아이들을 생각해. 이 애들은 잘못이 없어.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 나를 벌하고 내가 속죄하도록 해줘.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돌리, 용서해 줘!”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아내의 무겁고 커다란 숨소리를 들으니 오블론스키는 말할 수 없이 그녀가 가여워졌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
“당신은 아이들과 놀고 싶을 때나 아이들을 떠올려요. 하지만 난 언제나 아이들을 생각해요. 그래서 아는데, 아이들은 이제 장래가 없어요.” 그녀는 지난 사흘간 수없이 되뇐 표현 중 하나임에 분명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오블론스키에게 ‘당신’이라고 말했고, 그는 기꺼운 마음에 아내를 쳐다보고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겁을 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난 언제나 아이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애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 애들을 구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이들을 아버지에게서 떼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음탕한 아버지와 함께 살도록 해야 할지. 그래요, 음탕한 아버지……. 자, 말해봐요.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우리가 함께 살 수 있겠어요? 그게 가능하냐고요? 말해 봐요, 정말 가능해요?” 그녀는 언성을 높이며 되풀이했다. “내 남편이, 내 아들이 아버지가 자식들 가정교사하고 불륜을 저지르다니…….”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하란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머리를 자꾸만 아래로 떨구며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역겨워요, 혐오스럽다고요!” 그녀는 한층 더 열을 내면서 소리쳤다. “당신의 눈물은 맹물이에요!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에게는 진심도 없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없어요! 당신은 비열하고 역겹고 남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요, 남이에요!” 고통에 시달리고 악에 받쳐서 그녀는 자신에게도 무서운 ‘남’이라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적의에 놀랐으나 자신이 느낀 연민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쌍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나를 증오하는구나. 나를 용서하지 않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이건 무서운 일이야! 무서운 일!” 그가 중얼거렸다.
이때 다른 방에서 아마도 넘어졌음이 분명한 아이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순간 돌리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잠깐 잊고 있다가 정신이 든 것처럼 부리나케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그녀는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아이의 외침에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목격한 그가 생각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나를 미워할 수가 있지?’
“돌리, 한마디만 더.” 그녀의 뒤를 따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만일 나를 따라오려면 사람들과 아이들을 부르겠어요! 그래서 당신이 비열한이라는 걸 모두 알도록 하겠어요! 난 바로 떠날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애인이랑 살아요!”
그러더니 돌리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오블론스키는 한숨을 쉬고 얼굴을 닦은 후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마트베이는 일이 알아서 잘 풀릴 거라고 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내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아, 아, 정말 큰일이다! 그녀는 대체 왜 그리 저속하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 그녀의 고함과 ‘비열한’이니 ‘애인’이니 하는 말을 떠올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녀들이 들었을지도 모르잖아! 지독하게 저속하군, 지독해.’ 오블론스키는 눈을 문지르고 한숨을 내쉰 후 가슴을 쭉 펴고는 방을 나왔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거실에는 독일인 시계 수리공이 태엽을 감고 있었다. 오블론스키는 이 대머리 시계 수리공의 정확성을 두고 자신이 한 농담(‘시계 태엽을 감기 위해 평생 감을 태엽을 스스로에게 감은 사람’)을 기억하고는 미소 지었다. 오블론스키는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했다. ‘그래, 어쩌면, 알아서 잘 풀릴지도 몰라! 좋은 말이야.’ 알아서 잘 풀릴 거다. ‘이건 건 말해 줘야 해.’ 그가 생각했다.
“마트베이!” 그가 외쳤다. “마리야와 같이 안나 아르카디예브나가 묵을 수 있도록 거실을 잘 정리해 놓게.” 마트베이가 나타나자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블론스키는 외투를 입고 현관으로 나섰다.
“식사는 집에서 하실 건가요?” 배웅하던 마트베이가 물었다.
“글쎄, 봐서. 이 돈을 쓰게.” 그는 지갑에서 10루블을 꺼내 내밀었다. “충분하겠지?”
“충분하든 부족하든 이걸로 해결해야죠.” 마차 문을 닫고 현관으로 물러서며 마트베이가 말했다.
한편 아이를 진정시킨 돌리는 마차 소리에 남편이 떠났음을 알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그곳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침실을 나서기만 하면 온갖 집안일이 그녀를 에워쌌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잠깐 아이 방에 갔을 때 영국 여자와 마트료나 필리모노브나가 지체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해댔다. 아이들을 산책시킬 때 무슨 옷을 입힐까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까요? 다른 요리사를 구하러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건 모두 그녀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 날 좀 내버려 둬!”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침실로 돌아와 아까 남편과 말할 때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뼈만 남은 손가락에서 빠져나올 듯한, 반지를 낀 앙상한 손을 맞잡고 남편과 나눈 대화를 곰곰이 되짚기 시작했다. ‘떠났구나! 하지만 그 여자와 어떻게 끝낸 거지?’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그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닐까? 왜 그걸 묻지 않았을까? 아니야, 아니야, 화해할 수는 없어. 만약 한 집에서 그대로 살게 된다 해도 우리는 이제 남남이야. 앞으로 평생 남남이라고!’ 그녀는 무섭기만 한 이 말을 특별히 강조하며 되풀이했다. ‘아,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데, 정말이지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데! 얼마나 그를 사랑했던가! 그런데 이제는 정말 그를 사랑하지 않나? 전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건 아니고? 끔찍해. 중요한 건…….’ 그녀는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트료나 필리모노브나가 문 뒤에서 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 남동생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요.” 그녀가 말했다. “그 애가 알아서 저녁을 준비할 거예요. 아니면 어제처럼 6시가 되도록 아이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할 거예요.”
“알았어. 내가 지금 나가서 일을 볼게. 참, 우유를 사오라고 사람을 보냈나?”
이렇게 돌리는 일상사에 파묻혀 잠시나마 괴로움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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