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래의 인문학 강의[005]: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

in #kr6 years ago

[005] 들어가는 말 :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

이처럼 우리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의 인식 능력을 긍정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인식 능력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인문학이 바로 그런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공부를 ‘언어’롤 통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란 것도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요. 사실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마법과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어는 세상을 추상해내면서 ‘없는, 또는 절대 알 수 없는 객관적 존재’를 생각 속에 ‘있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인식의 한계를 넓혀나갈 수 있었고 인간만의 특별한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누릴 수 있었지요.

‘마법과 같은 능력’에 관해서는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예 가운데 하나는 “There is nothing”이라는 문장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 말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없는 것이 있다’가 됩니다. 한국어나 중국어, 일본어로는 대개 ‘아무것도 없다’고 번역됩니다. 인간은 없어서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진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보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 ‘없다는 개념(제로)’을 발명하여 어마어마한 숫자도 간단하게 정리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만든 숫자 체계를 통해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셀 수도, 도대체 얼마나 큰 숫자인지도 감각하기도 어려운 큰 숫자를 가볍게 처리해버립니다. 억이라는 숫자 단위만 해도 그런데 요즘은 그보다 천 배나 큰 조라는 숫자 단위도 뉴스에서 자주 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 쓰는 말은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 개념일 뿐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닙니다. 더 자세한 것은 언어학에서 다루겠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굳이 언어학적인 설명을 조금 덧붙이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모국어(언어)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잠깐 짚어두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는 아프리카의 나미비아 북쪽에 살고 있는 힘바족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힘바족에게는 색깔을 표현하는 단어가 여섯 개 정도밖에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색깔을 인식하는 체계가 우리와 아주 다릅니다. 그 가운데 다음 단어의 뜻을 보면 어떻게 저런 인식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주주’는 빨강 파랑 녹색 자주색 일부가 그에 속하고, ‘바파’는 주로 흰색이지만 노란색의 일부가 포함됩니다. ‘보루’는 일부 녹색과 파란색을 가리키며, ‘덤부’는 일부 녹색과 갈색, 빨간색을 포함합니다. 이런 언어를 가진 힘바족에게 ‘보루’에 속하는 녹색과 파란색을 섞어 두고 다른 색을 골라보라고 하면 ‘다른 색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보루에 속하는 녹색과 덤부에 속하는 녹색을 섞어 보여주면 금방 찾아냅니다. 우리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요.[1] 여기에서 같은 것도 집단의 문화라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7


11.jpg

이미지 8


위(이미지 7)의 경우 이 힘바족 여인은 다른 색깔을 고르지 못했고, 아래(이미지 8)의 경우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 녹색이 다르다고 했다. 왜 그들은 다른 색깔을 같다고 느끼고 같은 색깔을 다르다고 느끼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도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들은 같은 색깔을 왜 다르다고 하고 다른 색깔을 같다고 하는 겁니까?”

이처럼 언어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도구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역할도 합니다.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고,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도록 하는 것이지요.

[1] KBS2 세상의 모든 다큐, <우리가 모르는 색의 진실>(BBC, 2011).


(C) 강창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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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사실 모든 존재는 언어로만 규정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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