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5월 23일
1946년 미 군정, 민간인의 38선 무허가 월경 금지 명령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첫 상륙한 미군에는 한국 군정을 위해 훈련 받은 전문요원이 없었다. 하지중장 휘하의 6.7.40사단으로 이뤄진 24군단은 칼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던 단체들과 필립핀 주재 민정단 파견으로 군정의 공백을 매꿨다. 한반도를 독식할 자신도 묘안도 없었던 미.소 양국은 남북에서 두 강대국은 유리한 정치집단 체제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분단을 고착화시키기 위하여 미.소와 남북한 정치세력은 공동감독으로 이합집산과 혼미를 혹은 조장, 혹은 억압 등등으로 다양한 연출을 했는데, 그 와중에서 진정한 민족통일을 지향하던 지도자들은 거의 희생 당하고 말았다.
9월 2일 맥아더 사령관의 38도선 미.소 양군 분담 점령책을 공식발표 후 미 극동사령부는 남한내 군정을 선포(9.7), 38선 무허가 월경 금지 명령을 선포한다.(1946. 5.23) 유엔총회 한국총선안 가결(1947.11.14), 남한단독 총선거(1948.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거쳐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까지가 분단 정권 창출기에 해당된다.
1965년 ‘진통제 마약’ 메사돈 만든 제약사 급습
보건사회부와 마약감시반, 충북도경이 국도제약을 급습해 압수한 진통제 마약 메사돈.
1960년대 중반, 농어촌과 산간 벽지 등에서 갑자기 마약 중독자가 급증, 정부가 조사에 나섰으나 진통 주사제가 범람하는 것 말고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주사제를 수차례 검사했지만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제3의 물질’ 만 검출됐다.
배·머리가 아플 때, 나무하러 가거나 바다에 들어갈 때 한 대씩 맞은 진통제로 사람들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정부는 1965년 3월 현재 중독자가 1만5000명에서 2만명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최소 10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보건당국은 1965년 5월에서야 비로소 그 물질이 메사돈임을 밝혀내고 제조업체 추적에 나섰다. 메사돈은 아편보다 진통작용이 2배 이상 강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흰가루 마약이었다.
1965년 5월 23일 청주시에 있는 국도제약에서 진통제를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속반이 현장을 급습, 메사돈을 주성분으로 한 진통 주사액 20만통을 압수하고 사장을 마약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16명의 업자가 구속되고 관련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파렴치한 장사꾼들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1907년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매일신보》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李仁稙)·조중환(趙重桓)·이해조(李海朝)·이상협(李相協)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이광수(李光洙)가 처녀작 《무정(無情)》 《개척자(開拓者)》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후로는, 민족지와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편집국을 《경성일보》 편집국에서 분리시켰고,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으며,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 독립된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와 함께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자매지로 《월간매신(月刊每申)》(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每日新報寫眞特報)》 (1938.11) 《국민신보(國民新報)》(1939.4) 등을 발간하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로 광복될 때까지 다시 유일한 우리말 일간지가 되어 일제의 침략전쟁과 민족말살정책을 대변하였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날부터 광복되던 날까지 중단된 일 없이 발간된 단 하나의 한국어신문이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에 있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김해 사저 뒤 봉화산에서 투신해 오전 9시 30분께 서거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시신이 안치된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등산 중 바위로 뛰어내려 운명하셨다"며 "노 전 대통령은 가족 앞으로 간단한 유서를 남기셨다"고 발표했다. 문 전 실장은 또 "노 전 대통령은 오전 5시45분께 사저에서 나와 봉화산에서 등산을 하던 중 오전 6시40분께 바위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인다"며 "노 전 대통령은 8시 13분께 병원에 도착했으나 상태가 위중해 9시 30분께 서거하셨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사고 직후 사저에서 가까운 김해시 세영병원으로 먼저 옮겨졌으나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으며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다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세영병원측은 "병원도착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고 머리를 심하게 다쳐 외상이 심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접 사인은 머리 손상이라고 백승완 양산 부산대병원장이 밝혔다. 백 병원장은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8시 23분께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도착 당시 의식이 없었고 자가호흡도 없었다. 두정부에 11㎝ 정도의 열상이 발견됐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회복이 안돼 오전 8시30분 중단했다"고 말했다. 또 "뇌좌상이 확인됐는데 두부 손상이 직접 사인으로 확인됐다"고 말하고 "이외에도 늑골 골절, 골반 등 전신에 다발성 골절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권양숙 여사는 오전 9시 25분께 양산 부산대병원에 도착, 시신을 확인한 후 실신, 입원실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권 여사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온 문 전 비서실장은 병원에서 사고 경위 등을 파악하고 있다. 경찰과 경호 요원들은 외부인의 병원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1893(조선 고종 30) 연등놀이(화약비 80만냥).
1973년 대법원, 공해에 첫 배상판결(울산 과수피해 소송, 영남화학에 320만원 지급판결)
1980년 위컴 한미연합사령관, 연합사 소속부대 광주 진압에 동의.
1984년 정부, 65세이상 노인에게 지하철 무료승차 허용
1986년 문익환 목사를 집시법위반혐의로 구속
1987년 재야인사 134명, 「박종철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발족
1996년 북한 공군 리철수대위(30) MIG-19몰고 수원비행장 안착 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