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in #kr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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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의 이야기이자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책



 눈빛과 도넛으로 이어진 혁현과 천재소녀 채원도, 콜라텍에서 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배운 세훈도, 해바라기센터에서 바자회를 열던 설아도, 호탕한 선미를 아내로 둔 귓속에 벌이 들어간 우남도, 그 둘의 딸인 영린도, 지긋지긋한 궤양에 시달리던 희락도, 최연소 등장인물인듯한 정빈도, 콘트라 베이스 연주자 현도, 전부 내가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전부의 이야기이며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책, 그래서 이 소설이 좋아졌나 보다.


 등장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 중에 자주 나오는 도토리처럼 생겼다는 표현은 어떤 걸까, 도마뱀이 연결고리구나, 하는 생각들을 메모에 옮겨 적어본다. 피프티 피플, 50 people 즉 오십명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은 한 군데씩 얽혀있는 지점이 있다는 이 놀라운 책은 밑줄치고 싶은 자잘하고 빼곡한 지식들이 녹아들어 있다.


 초반 외과 병동 이야기에서부터 정신없이 전개되고 군데 군데 숨을 고를만한 이야기에도 멈추지 않고 구부러지는 어깨를 또 펴가며 계속 읽었다. 그러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거라는 대사에 이백 몇페이지까지 읽어 내려간 숨이 잠시 멈춰졌다. 완독을 한 후에도 왜 그렇게 빨리 단숨에 읽고 싶었지 의아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물론 한 차례 숨을 가다듬고, 한 글자 한글자 눈에 박으며 밑줄친 부분을 곱씹었더니 왜 의아해 했는지 알게 되었지만.


 정세랑 작가는 연재를 하는 동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50명의 얼굴이 아는 사람의 얼굴처럼 선명해졌다고 한다. 그 부분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 많은 독서 리스트에서 힘겹게 다시 끌어내 두번째 완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나도 작가처럼 50명의 얼굴을 조금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상속에서지만. 원작 제목은 '모두가 춤을 춘다'였는데, 등장인물 전원을 춤추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고백한다는 대목에서 이 소설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p.228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50명의 각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이 책은 적게는 한 장, 많으면 세네장 까지의 50개의 인생 단편 소설의 모음집이다. 주인공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정세랑의 작가의 생각에서 태어나게 된 이 소설은 처음과 끝이 명확하다. 소설 내용 중 많은 부분은 대화와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50명의 주인공의 모두 손에 쥘 수 없는, 명확하지만 명확한 윤곽선은 없는 그런 삶을 그려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소설 속에서 몇 사람이나 나를 닮았을까. 50명을 전부 떠올려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데 한 이십여분 정도 걸렸다. 엄마와 세상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해온 수정과는 당연 아닐테고, 익스트림 스포츠에 끈기있게 빠졌던 혜정과는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짧았던 여행기간과 소심한 성격을 탓하며 데이트 신청에 끝내 답하지 못했던 성진과도 닮은 데가 있지만, 문득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환의와는 다르다. 효율적인 채원과는 닮고 싶었고, 열네살부터 가족을 떠나고 싶었던 한영과는 닮은 구석이 있는지 사실은 모르겠다. 공황장애로 숨쉬기 힘든 순간을 견뎌냈던 윤나와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친구인 승희를 애도한 나은, 정리와 요리중 잘하는 걸 고르라면 정리를 고르던 운영, 사서였고 사서인 한나. 모두 같으면서도 다른 시간을 통과하며 책에 담겼다.


 많은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한 데 모아놓은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것 같다. 이렇게나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내는 작가의 머리속엔 뭐가 들어앉아 있는걸까, 라는 생각만 선명해지는 책. 뭐 뒤에는 뭐가 있고, 그것에는 이런 것들이 연결되어 있고, 저기와 여기는 이렇게 아는 사이고… 복잡한 실타래 얘기는 아니고, 그냥 우리들의 얘기다. 삶, 죽음, 범죄, 결혼, 이혼, 재혼, 직업, 우정, 사랑, 연애, 섹스, 사고, 그것도 대형사고… 우리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지만 잊혀지는 일들을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가느다란 실로 엮어냈다. 어렵지 않게, 섬세하게 모두의 시선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굳이 결말을 독서노트에 추출해내야 한다면, 아마도 해피엔딩이 아닐까.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겠지만.


 알았다. 나를 닮은 사람들은 모두였다. '그리고 사람들' 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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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해둡니다. 흥미가 생기네요.

eversloth 님께서 추천해주셔서 읽었는데 후기를 이제 올리네요. 믿고 보셔도 될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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