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들과 여행

in #kr6 years ago
몇일 전, 예상치 못했던 삶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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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아버지를 찾아뵙거나 아버지께서 직접 제주로 놀러오시곤 합니다. 부모님의 황혼이혼 후 저는 어머님과 함께 지내고 있지요 언제나 혼자 오시곤 했는데 이번엔 예상치 않게 아버지의 새 가족분들이 동행하신거죠.
공항에서 아버지를 뵈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던지 무슨 정상회담의 두 대표가 만나듯 어색하게 아버지와 악수하고 다른 분들과는 인사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될 지 몰랐거든요.
예약한 숙소로 이동하는데 머릿 속이 하얘졌어요. 아버지의 아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 아들의 엄마는 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친엄마와 함께 지내고 있기에 예전부터 그 분만큼은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강하게 거절한 터였죠. 예전 같으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아버지만 따로 보겠다고 고집했을텐데 인생 조금 더 살아봤다고 그 불확실한 사건에 나름 더 유순해진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영화에서 종종 새 부모를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제3자로서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내가 직접 마주하고 보니 그들은 어찌 그리 잘 대처했는지 저로서는 이해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거기에 맞추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니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저는 그 순간의 느낌과 감정을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생각정리를 자꾸 미뤄온 게 잠시 후회가 되더군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어떤 가치관을 더 우선해야할 지 고민스러울 때마다 나름의 균형을 이뤄보려고 해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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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달리며 마주 앉아 식사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저의 입장을 빨리 정리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새 부인은 제게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고 오히려 아버지를 잘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다만 저와 함께 사는 엄마생각에 감정이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죠. 그래서 내린 임시결론이 '모든 관계 무시하고 그냥 처음 본 남처럼 대하자'였습니다.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기존 사고방식과는 다른 접근이었습니다. 과거나 미래를 통한 어떤 정리된 생각보다 그저 지금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게 삶이니까요...

여행겸 저를 보러 오신 터라 이곳저곳 제가 아는 장소로 가이드해드렸고 아버지와 그간 깊이 못나눴던 대화를 마음껏 나눴습니다. 오묘하게 행복을 조금씩 맛보았습니다. 불쾌한 느낌이나 기분을 아버지께 표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꽤나 잘 하고 있고 남은 아버지와의 시간들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평온한 마음가짐이 그저 표면적이었을까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들이 저의 마음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꼬마 이복동생이 생각보다 산란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였던거죠. 그 아이를 바라보다 보니 그런 어수선함을 참고 봐주기가 싫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사랑하시기에(물론 저를 더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아이에게 주의를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 받아주고 계셨어요. 실은 그게 제 마음을 어지럽혔던 모양입니다. 계속 무시했어요. 별거 아니리라, 그리고 그냥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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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해안가와 절벽으로 유명한 섭지코지를 오르다보니 함께 있는 우리 모습이 가족이었습니다. 세 분의 단란함이 어색하나마 느껴졌어요. 그게 왠지 부러웠습니다. 난 거기에 끼어서도 안되고 끼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 뭔가 내 머리를 때렸습니다. 바로 마음 한 켠에 숨겨진 감정들이 드러난거죠. 이복동생에 대한 질투와 예전 저의 진짜 가족이 다같이 모여 여행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여행하는 내내 서려있었습니다.

그런 마음들을 발견하고 나니 더이상 함께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바라볼 때마다 그 분이 내게 주시는 사랑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마음들도 그냥 흐르도록 놔두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섭지코지에서 중문쪽으로 달려와, 갈치요리로 유명한 맛집에 왔습니다. 중간중간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있을 때엔 대화를 많이 나눴지만 식사 중에는 맛에만 집중했어요. 아무 생각도 받아들이고 싶지않아서 현재 내게 주어진 감각들에 집중했던 거죠. 그렇게 식사 후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한 번씩은 겪어보실 일이지만 제게는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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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개 한 마리가 제게 살며시 다가와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낯선 사람들에게 친숙한 녀석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 새로웠고 다른 이가 아닌 유독 제게 온 것 자체로 기뻤습니다. 저는 원래 개에 대한 큰 애정을 갖는 사람도 아니고 중립적인 편입니다. 그런 사랑스런 녀석을 많이 쓰다듬고 목을 만져주었는데 거기서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로였어요. 순간 뭐가 그리 기분 나빴나 싶을 만큼 누렸습니다. 심지어 개가 무서워 다가오지 못하는 꼬마 동생을 불러 함께 쓰다듬어 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름이 뭔지 궁금했지만 식당 사장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이 녀석과의 신선한 교감이 왠지 판에 밖힌 이름으로 덮어질까봐 그냥 그대로 그곳을 떠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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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남은 여정은 순조로웠고 공항에서 다정한 포옹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언제 또 볼 지 모르는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어서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인생은 초콜릿상자'라는 포레스트 검프의 말이 떠오르네요. 물론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지만 하나 같이 놀랍고 다채로운 순간으로 가득 차 있는 걸 한 번 더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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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존중과 이해 사이에서 공감을 향해가는 중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신거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다음에도 가족과함께 계획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것만은 피해야지 했던 일이 내 눈앞에 이루워졌을때,, 그 감정 ,, 저라면 여행가이드 못해드렸을것같은데 ㅠㅠ 그 감정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척 하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ㅠㅠ 그와중에 이쁜 강아지가 잇님 맘을 어루고 달래주어 좀 풀리셔서 다행이네요 ㅎㅎ
팔로우 하고 갑니다 ^^

흘려보낸다는 생각으로 있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ㅎㅎ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재미가 있잖아요. 무엇인든지 상황을 즐기시고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넵 즐기기!!! 감사합니다^^

무거웠던 마음과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텐데, 여행하는 내 다시금 추스려지고 위로도 받았다니 정말 감사하네요. 아니라고 하지만 dog person 이십니다. 유독 강아지에게 인기가 많으심. 저는 강아지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1인 아니 2인 이라는... 좋은 밤 되세요^^

그러게유~ 이러다 키우게 되는건가ㅋㅋㅋ 위로의 선물엔 격한 공감!!!

잘 하신거 같네요.
그냥 돌아섰으면 나중에 많이 후회하셨을수도
아마도 아버지께서 보고싶은신 마음이 더 크셨게에
그렇게 연락을 주셨겠지요.

네 그 마음덕분에 어떤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지않나 싶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네.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고
그리고 부모님이란 존재는 다른 어떤 이유나 상황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분이란걸 항상 생각해야죠.
두아이 아빠가 되어보니 더 많이 생각합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개인 이야기인데 포스팅 하셔서
앞으로 좋은 포스팅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일을 자식이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인듯 싶어요~ 그래도 잘 사시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제주에 사신다니~ 부럽네요~~ 좋은곳에서 힐링하며 사시는 기분일것 같아요~

네 사랑엔 존중이 들어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ㅎㅎ 말씀 듣고보니 제주의 힐링을 더 누려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읽어 주신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니까요.

네 그렇네요 저의 마음을 늘 읽어주셨던 분이기에... 감사합니다!!

마음공부를 하시는 군요
고생하셨고 대단하십니다. 그 강아지가 ^^멋지네요

네 마음공부.. 요즘 자주하게 되네요ㅎㅎ

진짜 당황스러우셨겠지만 잘 대처 하신거라고:)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습니다!

네 맞아용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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