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AN] 음악감상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in #zzan5 years ago (edited)

연어입니다. 제가 꼬마였을 때 외삼촌 한 분이 서울에 정착하겠다며 한동안 저희집에서 동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 음악에 빠져있던 외삼촌은 음반을 엄청나게 모으고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과 달리 취향이 인터내셔널해서 덕분에 저도 다양한 음악을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특이한 카세트 테이프가 하나 있었는데,

  • 빨간 케이스에 파란색 카세트 테이프
  • 이상한 외국어 (독일어, 독일 EMI 발매)
  • 클래식 (당시 외삼촌은 팝과 락에 빠져있었음)

이것이 제가 공식적으로 접해본 첫 클래식 음반이 아닐까 합니다. 어렵사리 몇 가지 정보도 알아냈죠.

  • 바하의 작품들을 연주
  • 1970년대 오케스트라 라이브 실황
  • 메인 바이올린 예후디 메뉴인(Yeudi Menuhin)

제가 예술적 소양은 그닥인 터라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잠이 잘 온다는 것과 바로크 음악으로 분류되는 바하의 음악들이 생각보다 듣기 좋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특별히 좋아했던 곡은 BWV 1043 번호가 붙어있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중 2악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아이작 스턴과 같은 바이올리스트의 연주도 들어봤지만 첫 정을 잊기 어려운지 예후디의 연주가 좋더군요. 라이브 연주라서 더 그랬나 싶습니다.


공학에 흥미가 없어 수업을 대충 듣는둥 마는둥 하던 때였습니다. 한 번은 어디 짱박혀 쉴만한데가 없나 학교를 뒤지고 다니다가 학생회관에서 딱 좋은 공간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조명도 조금 어둡고, 널찍한 쇼파에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주다니! 음악 감상하는 척하면서 낮잠 자기에 딱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전음악 감상 동아리에서 관리하는 음악감상실이더군요.

재미있는 것이 쪽지에 듣고 싶은 음악과 원하는 시간대를 예약하면 신청대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저도 시간표를 보고 어중간하게 시간이 비어있는 때에 맞춰 음악 신청을 해보았습니다.

  • 바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2악장
  • 예후디의 연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 감상 요청일 : OO월 OO일 OO시
  • OOO학과 OO학번 연어

몇 일 후, 교실에서 학과 동기 한 명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봅니다.

"너 우리 동아리에 음악 신청한적 있어?"
"너네 동아리가 뭔대?"

"고전음악감상"
"거기 음악 듣는곳? 낮잠자기 좋겠던데. 왜, 신청하면 안돼?"

"그게 문제가 아니고 OO선배가 왜 너에 대해서 묻지?"
"OO선배가 누군데?"

"있어, 동아리 1년 선배."
"뭐, 문제 있대?"

"야, 그 선배가 얼마나 인기 많은 선배인데 너에 대해서 자꾸 묻냐고?"
"이 자슥이. 그러면 안돼? 이쁘면 소개나 시켜주던가."

"야, 선배라니까?"
"얌마, 너한테나 선배지. 나 1년 재수했쟎아. 동갑일수도 있겠네."

"여하튼 안돼. 죽어도 안돼."
"어차피 내가 신청한 음악 감상할 때 만날수도 있겠구만."

녀석의 표정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 동기가 선배에 대해 꽤 관심이 많다.
  • 이쁜가보다.

역시 뭔가 있어보이게(?) 신청을 한 효과를 보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하스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할 그 때가 왔지만

  • 왠 투박한 목소리의 남자 녀석이 DJ를 보고 있었고
  • 신청한 곡은 음반을 찾지 못해 다른 곡으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힘 빠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죠.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슨 실험시간엔가 그 녀석과 같은 조가 되었고, 갑자기 그 선배라는 사람이 생각나서 얘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야, 그 이쁜 선배 잘 계시냐? 슬슬 소개해 주시지?"
"말 꺼내지마, 마음 아파."

"뭐가 또?"
"OO 선배가 방학때 유학을 떠났단 말이야."

이놈의 자슥, 진작에 소개나 좀 해줄 것이지...


37년 전에 독일이란 이상한 나라에서 온 테이프를 통해 접했던 실황 연주곡입니다. 화면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연주가가 예후디 메뉴인이고요.

  • 시작은 1악장
  • 2악장은 대략 04:30 경부터 감상하시면 됩니다
  • 3악장은 12:30 쯤부터 시작되네요.

음악에 대한 지식은 없는 편이니 이정도로 설명을 마무리합니다. 1970년대의 실황 연주를 이렇게 유투브에서도 검색해 볼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스토리가 얽힌 이 아름다운 협주곡으로 무르익어가는 가을 기분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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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한동안 클래식음악에 빠져 레코드판을 수집하기도한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 판들 잘 보관하고 계신지요? ㅎ

계속 잘 보관해 두시면 더욱 귀한 물건이 될수도 ^^

이놈의 자슥, 진작에 소개나 좀 해줄 것이지...

동기가 아니라 왠수네요(웃음)

이 친구 이름은 가물거리지만 그 때 그 표정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ㅋㅋ
그런데 오히려 그 선배라는 사람의 이름은 기억나네요 -_-;;

"야, 그 이쁜 선배 잘 계시냐? 슬슬 소개해 주시지?"
"말 꺼내지마, 마음 아파."

연어님도 관심이 많으셨나봐요^^ 이쁜 선배~ 관심의 대상이긴하죠^^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ㅎㅎ

음악취향이 맞는다는건 같은 취미 가지는 것 보다 더 힘들다던데 아마 그때 한번 만나보셨더라면 하는 저도 덩달아 아쉬움이 남는 글이네요 ㅎㅎ

저는 솔직히 취향이였다기 보다는... ㅋㅋ

  • 짱박힐 곳이 필요했고
  • 아는게 그곡 뿐이라 (나머진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

ㅋㅋ그런 클래식 듣다보면 솔직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보니 좋아하는 이유가 될만도 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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