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유선의 위나라에 황제 권력 이양하듯 민간에 국가는 권력 반납하라
삼국지연의 유선의 위나라에 황제 권력 이양 민간에 국가는 권력 반납하라.
효회제 유선(孝懷帝 劉禪, 207년 ~ 271년)은 촉한의 제2대 황제(재위: 223년 ~ 263년)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가 조위 정통론 의 입장에서 전 황제인 선주(先主) 소열제(昭列帝) 유비(劉備)와 구별하여 유선을 후주(後主)라고 지칭했기에 후주로도 불린다. 자는 공사(公嗣).유비의 적장남이자 감부인의 소생이며, 아명은 아두(阿斗)였다. 조운(趙雲)이 당양 장판파에서 구하였고 유비가 '너 때문에 용맹한 장수를 잃을 뻔하였다' 라고 한탄하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다고 전해지는 아두가 곧 그다.
17세에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고, 유비의 탁고 유지를 받든 승상 제갈량(諸葛亮)에게 내정과 외정을 총괄케 하고, 신료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제갈량 사후, 장완(蔣琬), 비의(費禕), 강유(姜維) 등에게 국정을 맡기고 정치에 관여를 거의 하지 않으며[출처 필요], 말년에 권신 진지(陳祗)와 환관 황호(黃皓)를 총애하였다. 재위 40년 째인 263년에 등애(鄧艾)의 기습 공격으로 수도인 성도(成都)가 위태로워지자, 그해 겨울에 위에 항복하였다. 이후 종회(鍾會)와 강유가 촉 회복 운동, 즉 위나라에 대한 반란을 꾀하다가 토벌된 뒤, 낙양(洛陽)에 압송되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 아명인 아두는 무능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인다. 촉한을 망하게한 자라고 불림.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선이 말년에 권신 진지와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나라를 망쳤다고 전해 온다.
하지만 《삼국지》 에 따르면, 촉한의 멸망 원인은 다른 데 있다. 263년 위가 촉을 정벌할 때 위나라 황제의 조서에서 이르기를, “촉은 작은 나라로, 영토가 좁고 백성 수가 적음에도 강유는 군대를 혹사하여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지난 해에 강유가 전쟁에서 진 뒤, 답중에서 둔전을 하며 수많은 강인(羌人)을 핍박하고 끊임없이 일을 시켜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선이 환관에게 미혹되거나 실정했다는 말은 일절 없으며, 위가 촉한을 치려 한 까닭이 황제 유선이 못나서가 아니라 강유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한 250년대 말까지는 황호의 발호를 동윤(董允)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견제하고 있었으며, 유선 또한 황호 이상으로 이들을 신임하였다.
하지만, 유선의 재위 말년의 정치적 실정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강유의 북벌이 실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선이 황호의 말에 미혹된 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와 촉의 국력 차이를 고려하면,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실정이 거듭될 경우 멸망할 수 있는 나라가 촉이었다.
262년 10월, 북벌을 위해 출병했던 강유는 패한 뒤 성도나 위가 촉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검각에 머물지 않고, 검각 북서쪽에 있는 답중으로 가서 주둔한다. 그러자 위나라 황제는 “촉이 의지하는 이는 강유뿐인데, 그가 본거지를 떠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라고 말하며 263년 5월에 촉 정벌에 나선다. 이후 유선은 반년만인 11월에 자살한다.
결국 촉한의 멸망은 위나라와의 국력 차이, 황호의 발호와 유선의 '사람에 의지하는 정치' 에서 비롯된 잘못된 인사기용, 촉한의 주력군의 사령관이던 강유의 전략적 실패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유선은 271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안락사공(安樂思公)에 봉해졌다. 유선이 지니고 있었던 안락공 지위는 위나라 시대에 이어 서진 왕조에 이르기까지 자손에게 승계되다가, 서진 말기 일어난 영가의 난 때에 후손들이 모두 죽거나 흩어지면서 중단되었다. 서진 왕조가 몰락한 직후 시작된 오호십육국 시대에 한(漢;훗날 전조)을 세운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은 자신이 한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유선에게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유선은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됐을 때는 어리석은 군주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흰색 실이 일정한 색깔이 없고 물감에 따라 물들여질 뿐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예(禮)에서는 국왕이 제위를 이은 뒤에 1년이 지나면 연호를 바꾼다고 했는데, 장무 3년에 건흥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이는 고대의 의리로 살펴보면 나라의 근본 예법에 어긋난다. 또 촉나라는 사관을 두지 않아 기록하는 관원이 없었으므로 시행한 정사가 많이 유실되었으며 재앙이나 이변도 기록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비록 정치에는 통달하였어도 이러한 일에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제갈량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20년이 지나도록 연호를 바꾸지 않았고, 군대도 여러 차례 출병했지만 쉽게 사면을 내리지 않은 것은 또한 탁월하지 않은가? 제갈량이 죽은 뒤부터 이런 제도는 점점 무너져 우열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119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http://upaper.net/homeosta/1009512
諸將皆曰:“既漢主失位,何不速降?”
제장개왈 기한주실위 하불속항?
여러 장수가 모두 말했다. “이미 한나라 군주가 지위를 잃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습니까?”
弋泣謂曰:“道路隔絕,未知吾主安急若何? 若魏主以禮待之,則擧城而降,未爲晚也﹔ 萬一危辱吾主,則主辱臣死,何可降乎?”
익읍위왈 도로격절 미지오주안급약하? 약위주이예대지 즉거성이항 미위만야. 만일위욕오주 즉주욕신사 하가항호?
곽익이 울면서 말했다. “도로가 끊어져서 우리 군주의 안부와 급함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위나라 군주가 예로 대우하면 성을 들어 항복해도 늦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군주를 위험하고 욕되게 하여 군주가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니 어찌 항복하겠습니까?”
衆然其言,乃使人到洛陽,探聽後主消息去了。
중연기언 내사인도낙양 탐청후주소식거료.
여럿이 그 말대로 사람을 시켜 낙양에 이르게 하여 후주의 소식을 탐지해 듣게 했다.
且說後主至洛陽時,司馬昭已自回朝。
차설후주지낙양시 사마소이자회조.
각설하고 후주가 낙양에 이를 때 사마소가 이미 스스로 조회에서 돌아왔다.
昭責後主曰:“公荒淫無道,廢賢失政,理宜誅戮。”
소책후주왈 공황음무도 폐현실정 이의주륙.
사마소는 후주를 꾸짖어 말했다. “공은 황음무도하여 현인을 폐기하고 실정을 하니 이치는 죽여야 하오.”
後主面如土色,不知所爲。
후주면여토색 부지소위.
후주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할바를 알지 못했다.
文武皆奏曰:“蜀主既失國紀,幸早歸降,宜赦之。”
문무개주왈 촉주기실국기 행조귀항 의사지.
문무대신이 모두 상주하였다. “촉나라 군주가 이미 국기를 잃으니 다행이 일찍 귀순해 항복하니 사면해야 합니다.”
昭乃封禪爲安樂公,賜住宅,月給用度,賜絹萬匹,僮婢百人。
소내봉선위안락공 사주택 월급용도 사견만필 동비백인.
사마소는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여 주택을 하사하며 달마다 용도할 재물을 주고 비단 만필을 하사하며 가동과 시녀 백명을 주었다.
子劉瑤及群臣樊建、譙周、却正等,皆封侯爵。
자유요급군신번건 초주 각정등 개봉후작.
아들인 유요와 여러 신하인 번건, 초주, 각정등은 모두 후작을 봉하였다.
後主謝恩出內。
후주사은출내.
후주는 은혜에 감격하여 안을 나왔다.
昭因黃皓蠹國害民,令武士押出市曹,凌遲處死。
소인황호잠국해민 령무사압출시조 능지처사.
사마소는 황호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에 피해를 주니 무사를 시켜 시장에 끌어내어 능지처참하게 했다.
http://www.happycampus.com/happyBook/view/101615
위 내용을 보면 유비의 아들 유선이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나중에 환관등의 말을 믿고 제갈량과 사이가 벌어져 결국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필자는 달리 생각하는데 유선은 전쟁을 싫어하는 厭戰염전 사상에 물들었을 수가 있다. 제갈량이 촉한에서 나와 위나라를 쳐 함락하고 중원을 차지해 한나라를 재건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다. 하지만 제갈량은 5번 나와 싸웠으면서도 제대로 한뼘의 영토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100만도 안되는 촉한의 백성은 과부와 고아가 되어 힘들게 살았다. 제갈량은 엄격한 법가 정치를 했으며 이렇게 백성이 피폐해지자 유선은 힘이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전쟁을 주장하는 제갈량이 죽자 수비만하기 좋은 촉한은 기강이 해이해져 멸망하게 된 것이다. 제갈공명은 한나라 유방을 도와 항우를 단번에 물리친 한신에 비교하면 한참 딸리는 인물이다. 또한 불쌍한 촉나라 백성은 성씨만 한나라 성인 劉유씨를 쓰는 유비를 위해서 원래 한나라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 아무런 명분이 없는데 전쟁에 동원되어 피해만 막심하게 당했다. 즉 촉한 정통론의 명분이 있다면 실제 실행으로 이루어야 하는데 실패만 거듭하여 결국 제갈량이 촉을 멸망시킨 것이 된다.
차라리 유선처럼 통째로 촉한을 위나라에 내줘 더 이상의 백성의 피해를 막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정부가 명분을 가지고서라도 하는 행위는 백성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625때 인민군을 막겠다는 이승만의 국민방위군은 싸우기도 전에 기아와 20만명을 죽게 했다.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보도연맹도 백성 40만명을 사망하게 했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아나키즘으로 정부는 없어지고 UN유엔등에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고 본다. 국가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각종 세금을 거두니 국민이 피폐 하게 한다.
노자 도덕경 제18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大道廢 有仁義 대도폐, 유인의
큰 도리가 행해지지 않게 되자 인(仁)과 의(義)가 강조되게 되었고,
智慧出 有大僞 지혜출, 유대위
지혜가 발달하니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불화, 유효자
집안 사람끼리 불화가 생기게 되니 효(孝)와 사랑이 강조되고,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혼란, 유충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면 충신이란 것이 만들어지게 된다.
역사를 보면 촉나라가 혼란해지니 제갈공명이 충신을 가면을 뒤집어 쓴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주권은 고대사회의 주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산업의 발달로 착취해갈수 있는 자원의 폭이 늘어났기 때문이죠. 당장 의학의 발달로 사람의 장기가 몇천만원에 거래되는 세상인데, 일제 강점기 시대가 현대였다면 아마 한국사람들을 대상으로 장기밀매도 했을껍니다.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에 없었던 빈민을 더욱 못살게 하는 간접세 부가가치세등 각종 세금이 늘어난 것을 보면 현대인들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