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민 소설 태극기 음모와 국기모독죄 2
김 검사가 말했다. “아실만한 분이 왜 태극기를 태우십니까? 지금은 뭐하십니까? 직업이?”
진한국은 말했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온뒤 석 박사까지 받고 사실 교수를 하려고 했는데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강사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서 한의대를 다시 들어가 졸업하고 지금은 한의사를 하고 있습니다.”
김 검사가 말했다. “사회 지도층이신 분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태극기를 불태웁니까?”
진한국이 말했다. “박영효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김 검사가 말했다. “별로 관심도 없고, 바빠서 듣지 못하겠습니다. 조서나 꾸미겠습니다.”
진한국이 말했다.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묵비권 행사하겠습니다.”
김 검사가 말했다. “검찰을 협박하십니까? 좋습니다. 말씀하세요.”
진한국은 박영효에 대해서 말을 이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 귀족에 편입되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금 28만원을 받고 2월 작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작위 수여를 거부하고 28만원의 공채금도 반납한다. 1911년 조선귀족들의 친목단체인 조양구락부 유지회의 설립에도 창립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1911년 7월 한문, 교양, 문자, 고전 등의 보급과 간행을 목적으로 문예구락부가 결성되자 참여,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9월 조선귀족들의 친목단체인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일합방 직후 공식 활동에서는 한발 물러나 기업과 은행, 토지 매입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조선은행의 주식을 매입하여 주주가 되었다. 1912년 1월 이문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8년에는 이문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2년 2월 권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주주가 되었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독립운동에 참여를 요청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오자 그는 자금력이나 경제적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무엇으로 일본에 저항하느냐며 이들들 되돌려보낸다. 한일합방으로 형식적으로 후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조선총독부의 각종 행사에 소극적이거나 불참, 회피하였고 1913년부터 그에게 중추원 부찬의와 찬의 등에 취임해줄 것을 권고받았지만 모두 거절한다.
1913년 4월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고 8월 녹지조림과 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바로 보식원의 조합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동래-대구 간 철도를 놓을 때 민자 유치를 계획하자, 7월 지사들과 함께 조선경편철도회사에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5년 1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성지부에서 활동했다. 1915년 5월에는 자신의 사저 250원을 물산공진회에 기부하였다. 그해 9월 박람회 명예고문에 위촉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에 피선되었다. 1918년 5월 조선귀족회 회장직을 사퇴,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국장 고문 겸 석비전면서사원에 임명되어 고종의 비문을 작성하였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실패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에게 3.1 운동의 진압이나 해체를 촉구하는 담화나 서신 작성을 의뢰하였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그 뒤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19년 5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 설립과 함께 경방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6월에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12월 조선경제회 회장, 1920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민립대학 기성회, 조선인 민영 병원 설립운동에 동참하였다. 1920년 4월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으며, 그 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20년 5월에는 노동대회 총재에 선출되었는데 이 일로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바로 6월에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한다. 이어 조선산업은행 발기인으로 창립위원장을 맡았다. 1920년 10월 경성부 사립피병원 창립기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병원설립 기성회 조직 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신민공사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출되고, 3월에는 사회단체인 사민회 총재와 유민회 총재에 위촉되었다. 유민회는 3.1 운동 이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계속 협력, 협조를 요청했고 그는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 직책에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 1921년 4월 중추원고문에 선임되고, 6월 공직을 맡게 되면서 산림회원으로 활동이 불가능했지만 조선산림회 고문에 위촉되고 명예회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조선인 임시 산업대회의 위원장으로 행사를 주관했고, 9월 범태평양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10월에는 경성도시조사계획조사회 고문에 위촉되고 11월에 경성부에서 개최된 조선불교대회의 고문으로도 위촉되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장례위원이 되고,바로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식을 주관했다. 4월에는 제1회 조선미술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1923년 4월 제2회, 24년 4월 제3회, 25년 제4회 미술심사위원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1922년 4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이 된 뒤, 6월 사회단체인 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해 9월 중추원고문직을 사퇴하고 야인이 되어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사회단체인 조선협회 고문이 되었으며, 조선문제 간화회 간사가 되었다. 1922년 10월 조선흥업은행 창립발기인으로 11월에는 조선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고학생구제방법연구회의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이후 조선서적인쇄사의 주주가 된다. 1923년 5월 범태평양조선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고, 9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내 조선인들에 대한 인심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설득과 담화 호소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1923년 9월 관동진재의연금모집조성회를 조직, 관동 대지진으로 희생된 일본인들의 위문과 구호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본내 악화된 조선인에 대한 여론악화를 수습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10월에는 간토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교부되는 일본 정부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조선예산불감축운동을 주관하였다. 이어 조선예산불감축 시민대표위원회 일본파견 실행위원에 선출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일선 동조론에 대해 허위사실이며 사실무근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신궁봉경회에 참여할 때도 나타났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에 동조하게 된다.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동조론에 호응, 동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곧 동민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5월에는 조선구제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11월에는 조선사문학회(유교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5년 불교연합단체인 조선불교단이 설립되자 고문에 위촉되었다. 25년 6월에는 경성흥산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2월 정3위에 승서되어 다시 관직에 나갔다. 1926년 다시 중추원 찬의에 선출되었으며, 3월 교육협성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4월에는 순종이 붕어하자 순종 국장식 장의위원이 되고, 5월에는 장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7월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취체역에 선출되었다. 10월 조선문헌협회에 후원금을 내고 특별찬조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경성방송국 JODK 취체역에 선출되었다. 그해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어 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의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말 다시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1월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장례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임명되어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그해 3월에 귀국하여 조선농업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조선산업주식회사의 사장에 취임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중추원 부의장직을 사퇴하려 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그에게 1928년 2월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위원회 위원, 조선귀족 편입 심사위원에 임명한다. 같은 달 조선박람회 경성협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선출되고, 9월에는 조선박람회 총재에 선출되었다. 1928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6월 조선비행학교 창립 위원회 위원이 되고, 7월 비행학교 창립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7월 왕공족심의위원회 심의관에 임명되고, 8월 조선금융제도조사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달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유유아 심사회 고문에 위촉되고, 11월에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첩인 박씨를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건너가 즉위식에 참석하고 귀국, 대례기념장을 특별히 받았다.
1929년 1월 광영산업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해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8월 의주광산회사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었다. 1929년 9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단체인 창복회에 가입, 동회의 이사로 피선되었다. 192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20주기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1930년 5월 사단법인 조선공업회 고문이 되고, 6월 화순무연탄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어 운영하였으며, 9월 조선임산공업주식회사 대표취체역이 되었다. 10월 조선식산은행 이사직을 사퇴하면서 동시에 조선식산은행 고문에 위촉되었다.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 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31년 11월 만몽재주 동포후원회 고문,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에 추대되고, 12월 조선공민교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3월 조선간이생명보험 사업 자문위원회 위원, 4월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1932년 5월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부총재가 되고, 6월에는 공자의 도를 되살리고 신학(기독교)을 배척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유림단체 대성원에 가입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7월 신흥만몽박람회 명예부총재가 되었다.
말년에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귀족원 의원(1932년)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 1932년 12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종사하였다. 같은 달 조선나예방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3년 7월 중앙진흥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8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고문으로 위촉되고, 10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신궁봉찬회 고문이 되었다. 10월에는 경성부에서 불교계 인사들에 의해 개최된 열린 이토 히로부미 25주기 추도재에 참석하였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이 되었다. 4월 재단법인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7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자문위원회 고문, 11월 일만면화협회 조선지회 고문이 되었다. 1935년 10월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다사케 동상건설회 발기인이 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937년 4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이사를 겸임하였다. 그해 10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었다. 1938년 4월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0월에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은퇴하면서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의친왕의 아들 이우가 일본 왕실이나 일본 귀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의친왕 역시 일본인 며느리 불가론을 펼치면서 갈등이 빚어지자, 그가 사태 중재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타협의 조건으로 자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안을 제시했다 한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이우가 이미 그의 손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하였다.
1939년 금강산협회 이사가 되었다.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고, 4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고문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7월 조선귀족회 통상총회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9년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는 후작·중추원부의장직에 재직중이기도 했다. 사후 그의 작위는 장손인 박찬범이 계승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78세였다.
1939년 11월 일본의 사회단체인 흑룡회가 선정한 일한합방 조선측 유공자 추도회를 할 때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과 함께 합병 공로자로 추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묘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박영효의 묘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찬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1962년 계몽,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감안되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후작 등을 제수받고,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제수한 중추원과 관직을 역임한 점이 감안되어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진한국이 말했다. “설사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가 첫째라고 해둬도 좋습니다. 만약 박영효가 만들었다면 친일파가 만든 태극기를 우리나라 상징으로 써야 합니까?”
김 검사가 말했다. “박영효가 처음에는 애국적 행동을 하고, 나중에 친일로 돌아섰는데 일제 시대 친일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제 자랑같지만 제 고조할아버지께서는 독립투사였습니다.”
진한국이 말했다.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렇다면 애국가는 누가 작곡했습니까?”
김 검사가 말했다. “저를 심문하시는 겁니까?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안익태 아닙니까? 안익태도 친일 의혹이 있더라구요.”
진한국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안익태는 표절의혹도 있습니다. 안익태의 작품 중 '애국가' 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로 쓰이고 있지만, 그 작곡 연도와 장소에 대한 이견이 많다. 1964년 제 3회 서울 국제음악제 때 내한한 불가리아 지휘자 페터 니콜로프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O! Dobrujanski Krai)' 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안익태의 활동에 대해 독재적이라고 비판하던 국내 음악계의 분위기와 맞물려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음악학자 허영한이 애국가는 안익태가 유럽을 방문하기 전인 1935년 11월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되었다는 견해가 수정되기도 했다. 허영한의 연구가 표절이 아니라는 충분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 동안의 유럽 작곡설을 뒤집었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신빙성이 강화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애국가 외에도 '강천성악' 에 나오는 선율이 일본의 궁중 음악인 '에텐라쿠' 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 안익태의 유럽 체류 시절 연구에서 발견된 작품인 환상곡 '에텐라쿠' 가 원본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유럽 체류 시절 안익태가 관변 단체였던 '일본-독일 협회' 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가가쿠를 주제로 한 '에텐라쿠' 와 일본제국에 의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일을 기념한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발표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잡지 '객석' 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즉 친일파였다는 소리다. 이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김검사가 물었다.“그래서요?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었입니까? 친일파가 만들었건 어쨌건 그래도 나라에서 국기, 국가를 제정을 했다면 따라야 하는 것이 국민의 법이죠. 악법도 법이란 말을 모르십니까?”
진한국이 말했다.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악법도 법이다’ 란 말을 누가 했습니까?”
김검사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소크라테스 아닙니까? ‘너 자신을 알라’와 가장 유명한 말인데요.”
“소크라테스의 변명등 제자인 플라톤의 저작중에 어디에 나옵니까?”
진 검사가 말했다. “그건 제가 모르죠. 제가 철학자입니까?”
진한국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야기가 길어도 끊지 마세요. ‘악법도 법이다’는 아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법체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잘못 알려져 있다.‘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인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라틴어: Dura lex, sed lex)에서 왔다. 2세기경 로마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이것은 진실로 지나치게 심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기록된 법이다.(Hoc quod quidem perquam durum est, sed ita lex a est)”라고 쓴 바 있다.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는 1930년대에 출판한 그의 책 《법철학(法哲學)》에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고 썼다. 이후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와전되었다. 권창은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강정인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이 일화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4년 11월 7일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초, 중, 고교 교과서에서 헌법에 대해 잘못된 내용을 찾아,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에 수정을 요청했다. 이 때, 일부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며 독약을 먹었다는 내용은 준법사례로 연결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까지 계속 아테네를 씹으면서 죽으라면 죽어주마 더러운 세상 하며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이 악법이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법 도그마틱적인 관념을 비판한 것이다. 오히려 아테네의 법 자체는 훌륭한 법이라고 인정했으며 자신이 따르기로한 그 법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아테네가 훌륭한 법을 가지고도 법적인 도그마로 인해 큰 문제를 낳을 수 있음을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증명한 것이다. 이는 나중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계승되어 각자의 방식으로 성문법의 불완전성과 그것의 대안에 대한 이론을 펼치게 된다. 그리스에는 ‘악법을 지키는건 시민이 아니라 노예다.’ 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
진한국이 말했다. “자 그렇다면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날조해내서 이득을 본 세력은 누굴까요?”
김 검사가 반어법적으로 말했다. “참 똑똑하십니다. 덕분에 배운 것도 많구요. 지금 국기 모독죄가 악법이란 말입니까?”
진한국이 말했다. “국기모독죄는 필요합니다. 악법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단지 현재 태극기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느냔 겁니다. 현재 태극기는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김 검사가 말했다. “저야 모르죠. 지금 설명해 주시려구요?”
진한국이 말했다. “설명하기는 깁니다. 지금 자료는 가져오지 않았구요. ”
김 검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잘 됐네. 어짜피 시간이 지났으니 나도 태극기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 사람은 우선 내일 오라고 해야겠군.’
김 검사가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피곤하신 듯하니 밤샘 조사를 할수도 없고, 또 신원이 확실하고 도주와 증거인멸할 염려가 없으니 구속영장은 발부하지 않겠습니다. 내일 나와 주실 수 있나요? 그런데 안오시면 강제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구인할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칠까요?”
진한국이 말했다. “아닙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시간 알려주시면 내일 나오겠습니다. 제가 양심불량은 아니니 어디 도망갈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내일은 일요일인데 검사님 쉬시는 날이 아니십니까?”
김 검사가 말했다. “네 저는 일요일도 없이 일합니다. 아무튼 사건을 빨리 조사해야 하니 내일 오전 10시에 나와주세요.”
진한국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덕분에 검찰청 구경도 하네요.”
진한국니 문을 나서니 김 검사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일까? 나도 배운만큼 배운 사람으로 국사에 대해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인데 이 태극기, 애국가 모두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나는 역사에 대해서 잘못 아는 사실이 많을까? 누가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나?”
김검사는 한주사가 들어오니 한주사에게 물었다. “태극기 누가 만든지 아세요?”
한주사는 대답했다. “들어본 것 같은데 갑자기 물으시니 생각이 안나네요. 박... ”
김 검사가 말했다. “박영효요? 혹시 이응준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주사가 서류를 보며 한귀로 듣고 말했다. “배용준요? 욘사마?”
김 검사가 말했다. “아뇨 이응준? 금시초문이세요?”
한주사가 말했다. “이응준이 누구죠? ”
김 검사가 속으로 생각했다. “태극기 처음 만든 사람요. 한번 태극기 이응준이라고 쳐서 인터넷검색 해보세요.”
한주사가 말했다. “누가 만든게 중요한 가요? 아무튼 진한국 그 놈 국기 모독죄는 시인했나요?”
김 검사가 말했다. “네, 그런데 내일 조사를 더하기로 했습니다.”
한주사가 말했다. “검사님, 뭘 조사를 더하십니까? 어짜피 자백하고 증거물도 있으니 형량 때리시고 다른 업무에 집중하셔야죠. 내일 저도 나와야 합니까?”
김 검사가 말했다. “아뇨, 나오실 필요 없으십니다. 일요일 오전 교회 가셔야죠.”
한주사가 말했다. “그럼 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사실 제 딸래미 생일인데 일찍 가봐야 해서...”
김검사가 말했다. “얼른 가보세요. 저한테 말씀하시고 퇴근하지 그러셨어요.”
김 검사는 미혼이었고 여친도 없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우선 더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진한국 이놈 인터넷 자료를 찾아봐서 똑똑한 척하네. 나도 자료 더미로 그 놈 기를 죽여야겠다. ’
우선 이 놈이 괜히 애국가를 질문할지 모르니 애국가부터 찾아볼까?
위키피디아에서 김검사는 애국가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찾아보았다.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초에 쓰였으며, 작시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라고 적혀있다. 작사자에 대한 설은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시대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에 의하면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일부 작곡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안창호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했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 되었고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있는 것을 보면 안익태씨가 여러 방면으로 애국가를 출판하고 보급한 것으로 보인다.[모호한 표현] 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지만 한반도에는 일제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 을 매일 방송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로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면서 국가로 쓰게 되었다. 그당시 국민 마음속에 자리잡은 애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여 성문법으로 따로 규정하고 있지 않고,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있다.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
한글
漢字混用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1 東海 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2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 南山[앞산]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바람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3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4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 이 氣像과 이 맘으로 忠誠을 다하여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프로야구나 프로농구 경기에서는 경기 전에 이 노래를 연주하지만, K리그 클래식이나 K리그 챌린지 경기에서는 저작권 논란으로 인해 거의 연주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군 부대에서 아침 점호를 받을 때는 하루 단위로 돌아가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애국가 연주를 거부한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축구 경기는 평양에서 치르지 못하고 중국에서 치르고 있다.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불가리아어: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 "도브루자 땅이여")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 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
애국가 곡에 대한 또다른 비판으로는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린다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한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위대한 게시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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