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2

in #kr8 years ago

장현태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혼자서 시작한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화벨은 마치 기상을 알리는 자명종처럼 적요한 거실에 느닷없이 울려 퍼졌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장 부장의 강아지풀처럼 까칠한 목소리는 식사가 주는 포만감을 단번에 깨어놓았다.

나는 전화기 옆에 놓인 볼펜과 메모지를 끌어당겨 재빨리 적어 가기 시작했다.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아 볼펜으로 메모지를 북북 찢다시피 하며 장 부장이 불러주는 것을 하나씩 메모해 나갔다.

여전히 느릿느릿한 장 부장의 목소리는 지금 내리고 있는 지령의 중량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평온함을 전해주었다.

"여덟 시 삼십 분까지 방배동에 있는 카페 ‘에트랑제’에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기다리면 금발에 구레나룻을 기른 사십대 초반의 백인이 나타날 거다. 180 센티미터에 약간 마른 체격이고, 색 바랜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을 거야. 그 놈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이상!”

군 출신답게 일방적인 명령으로 내뱉고 끊어진 전화를 오늘따라 왠지 짜증스럽게 느끼며, 나는 남은 밥을 숟가락으로 모조리 긁어 한 입에 쑤셔 넣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쳐다보니, 6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로 바꿔 꼈다. 그런 다음 도수가 없는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을 새로 착용했다.

최근 들어 부쩍 나빠진 시력은 활동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마치 몬도가네라도 된 듯, 시력에 좋다는 약이나 음식 -소의 간이나 간유구, 눈 영양제, 결명자차 등-을 닥치는 대로 먹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번 나빠지기 시작한 시력은 탄력을 잃어버린 용수철 마냥 원상태로 회복되기 힘들었고, 이제는 더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더부룩한 머리도 가지런히 뒤로 빗어 넘기고 살짝 파마가 된 곱슬머리 가발을 뒤집어 쓴 뒤, 한 올 한 올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정성스럽게 빗질을 했다.

그런 다음 얼굴에 갈색 물감을 엷게 바르고 나서 부드러운 거즈로 살짝 닦아냈더니, 선탠을 한 것처럼 피부색이 가무잡잡하게 보였고, 눈썹 위에도 아이섀도를 덧발라 눈썹이 짙어 보이게 만들었다.

코밑에는 며칠 면도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숱이 적은 수염을 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금색으로 수놓인 감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카키색 롱코트를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모든 작업을 끝냈다.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보니, 좀 지저분해 보이는 사내가 거울 속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 사내가 타인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처럼 그럴 듯하게 변장을 하게 된 것도 다 연기 학원과 미용 학원에 나가 분장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치밀한 성격의 장현태 부장이 거의 강압적으로 수강을 받게 만드는 바람에 마지못해 다닌 학원이었다.

수강을 받을 당시에는 성가시고 귀찮았지만, 지금은 그때 배우게 된 것을 내심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파트를 배회하는 도둑고양이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와 아파트의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이십 삼 분이었다. 나는 시계가 그 전부터 2분쯤 빨랐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시계의 분침을 두 눈금 뒤로 돌리며 다소 여유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어쭙잖은 시도를 비웃듯 가슴은 긴장감으로 강하게 조여 왔다.

날은 이미 저물어 아파트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들을 제외하면 거리는 벌써 석탄 더미와도 같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밤하늘에는 몇 개의 별들만이 명멸할 뿐, 달은 고층아파트의 높이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뺨을 스쳐 가는 바람이 다소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서서 하늘을 잠깐 쳐다보았다.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바라보는 좁은 하늘은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싸 하니 아프기 시작했다.

‘감정은 금물이다.’

나는 슬그머니 약해지려는 마음을 고무벨트로 칭칭 동여매듯 다부지게 감아 조이며 차안으로 들어갔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동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브레이크 페달을 살며시 놓으며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자, 차는 지친 사막의 낙타처럼 슬금슬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도로는 그리 혼잡하지 않았다.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는 쥐 떼들 마냥 차들은 줄지어 어디론가 끊임없이 몰려가고 있었다.

평소처럼 여유롭게 차를 몰아 카페에 도착해 시계를 쳐다보니, 8시 정각이었다.

차를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주차시키고, 개장수한테 끌려가는 강아지가 찔끔찔끔 오줌을 누며 뒤돌아보듯, 그 역시 되돌아 올 길을 찬찬히 눈에 익히며 카페 ‘에트랑제’로 들어갔다.

우선 카페의 출구가 잘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맥주 두 병과 마른안주 하나를 시킨 다음, 눈의 조리개를 최대한 열어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별다른 내부 장식이 거의 없는 자그마한 카페였다.

출입구 하나에, 테이블은 열두 개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밀실은 없는 것 같았다. 낮은 칸막이들만이 테이블 사이를 분리해놓고 있을 뿐이었다. 칸막이는 싸리나무로 엮은 시골의 담처럼 나지막한 앉은뱅이였다. 그래서 내가 앉은 자리에서도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동태를 충분히 살필 수가 있었다.

화장실은 출입문 바로 옆에 있었고, 계산대에는 주인인 듯 한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갈퀴처럼 길고 붉은 손톱으로 무료하게 여성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재즈가 개울처럼 흐르고 있는 홀 안은 열두 개의 테이블 중에 네 곳에만 손님이 앉아 있을 뿐이어서 늦가을의 정서처럼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벽난로처럼 보이도록 꾸민 전기 장치의 붉은 불빛만이 그나마 썰렁한 공기를 맹렬히 데우고 있었다.

문제의 외국인이 들어온 것은 여덟 시 이십 오 분경이었다. 사내는 제법 힘깨나 쓸법한 건장한 한국청년 두 명과 함께 카페로 들어와 망설임 없이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장현태 부장이 일러준 대로 사내는 얼굴 전체가 무성한 구레나룻으로 덮여서 꼭 한 마리의 원숭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의 몰골은 주인의 양복을 빌려 입은 유인원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래. 저 녀석은 한 마리의 원숭이일 뿐이야. 나는 원숭이 한 마리를 처치하기 위해 여기 온 거야. 밀림의 노련한 사냥꾼처럼.’

나는 남은 맥주를 잔에 모두 따르고, 주섬주섬 떠오르기 시작하는 생각들을 차례차례 정리하기 시작했다.

놈을 해치우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 갈 때를 노리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은밀하고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이미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하며 카페 내부를 자세히 살펴두었다. 게다가 만약을 위해서 준비해 간 드라이버로 창틀을 고정시킨 나사못도 살짝 풀어놓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창을 뛰어넘어 신속하게 도주할 수 있었다.

화장실 창문을 통해 내다본 바깥은 건물의 주차장으로 바로 통하고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 사내가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방법이 여의치 못하면, 카페 안에서 놈을 처리해야만 한다. 거치적거리는 두 청년을 먼저 때려눕히고 구레나룻의 사내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은 한정되고 제한된 공간 때문에 의외의 난관에 봉착할 수가 있고, 두 청년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완강하다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일 것이다. 또 만약에 하나뿐인 출구가 봉쇄된다면 도주로가 차단될 우려마저 있었다.

나는 이 방법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방법만은 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사내를 카페 밖에서 해치우는 게 마지막 남은 방법이었다.

밖은 이미 밤바다처럼 짙은 어둠에 잠겨 있고, 사방은 갯벌처럼 훤히 트여 있기 때문에 일을 처리한 후, 쉽게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사내를 삽시간에 해치우고 얽히고설킨 골목길을 날렵하게 빠져나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이 세 가지의 방법을 놓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판단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우선은 풀숲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노련한 맹수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구상들은 갑자기 카페에 나타난 천종수로 인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바로 해치우라는 지시야. 저쪽 인원이 더 불어난다는 정보가 있어.”

천종수는 자기 할 말만 황망히 전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갔다. 천종수에게 가져다주려고 컵에 물을 따르던 종업원이 천종수가 그냥 나가버리자 머쓱해 하며 물 컵을 도로 내려놓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나는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천종수는 장현태 부장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심복이었다. 다소 겁이 많은 점을 빼고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수재로서, 장 부장의 두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쨌든 천종수가 직접 카페에 들러 이 같은 사실을 알려줄 정도라면 일 처리가 빠를수록 좋다는 얘기였다.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강한 추진력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나에 대해 말하곤 했다. 나 역시 사람들의 그 말을 일견 수긍했고, 그것을 일종의 긍지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 이렇게 야수처럼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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