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는 경리단길과 패러다임이 다르다
몇 년 전에 시장조사 차원에서 조명을 구하러 을지로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뭔가 여기 저기 찌든 때가 유독 눈에 들어왔던 으스스한 골목과 물건을 둘 데가 없어서 그런지 가게 밖으로 빛바랜 물건을 듬성듬성 쌓아 둔 모습이 삭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제 기억속의 을지로는
별로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언론을 통해서 주변 지인들을 통해서 을지로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종 듣게 되었습니다. 새로 떠오르는 곳이라는 말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아직도 안 간걸 보니 그리 구미가 당기진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다시, 을지로>를
읽고 난 후에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가야 할 강렬한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 이유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입니다. 을지로에서 이태원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접근과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고군분투를 느낄 수 있었고, 그곳에 피부에 와 닿는 이야깃거리가 있었습니다.|<다시, 을지로> 김미경그 이야기 속엔 생태계와 공생, 실험과 문화예술이라는 키워드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을지로를 을지로답게 만드는 차별점이자 시작점이 바로 생태계가 아닌가 싶네요. 을지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조 산업을 책임지던 한 축으로서, 경험을 기반으로 한 견고한 제조 시스템이 들어섰습니다. 소재부터 시작해 디자인, 제조까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죠. 그러나 결국 을지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듯 그 시스템도 결국 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저 과거의 흔적으로서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자산들입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경험치와 실전 지식들이 외적인 흔적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그 빛이 바래고 있었습니다.
| <다시, 을지로> 김미경
바로 이 시스템을
자양분 삼아 색을 입히고
꽃을 피운 것은
청년들입니다.
을지로 원주민들의 물리적, 지적 자산을 자원 삼아 예술을 매개로 '을지로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과 문화라는 단어 때문인지 이렇게만 보면 뭔가 '힙'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이태원의 그것과는 패러다임 자체가 다릅니다.
캐나다의 지리학자 데보라 코웬에 따르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도시의 다른 공간들을 즐기는 힙스터의 행동은 타인과 다른 패션, 가치, 취향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동일한 맥락이며 이는 '구별 짓기'의 일환으로 해석해야 한다. (64쪽)
이태원의 성장 배경이 '힙'함이 더욱 부각된 경우라면 을지로는 '생존'이 더 큰 영역을 차지합니다. 이태원의 문화는 남들과는 구별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힙하다는 뉘앙스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트렌디함을 추종하는사람들을 모여들게 만들었으나, 동시에 큰 자본들도 끌어들였습니다. 결국엔 자신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죠.
|고기를 포장하던 공장이 즐비했던 뉴욕의 미트패킹 구역.
지금은 뉴욕의 핫플 중 하나.견고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제아무리 독특한 지역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 한들, 결국 돈에 잠식당할 수 밖에 없는게 자본주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을지로가 특별한 것은 '힙'함이라는 겉치레로 치장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새로운 을지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을지로 청년들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하는 중입니다.
회사원이나 영세 사업자가 대부분인 을지로에서는 자연스럽게 소주 혹은 맥주 중심의 문화가 발달했다. E와 조직원들은 커피 한 잔 마시듯 가볍게 와인을 마실 수 잇는 문화를 이곳에서 도입해 보고자 했다. (중략) 그런가 하면 B는... 사람들이 공간을 필요에 의해 잠시 스쳐 가는 것이 아닌 향유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공간에서 겪는 우연성을 느끼는 일종의 '취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76-77쪽)
그러나 이들의 실험이 청년들끼리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을지로 시스템 위에서 장인들과의 공생, 그리고 서울시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한 적극적인 지원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을지로만의 새로운 삶의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청년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을지로인들이 더이상 후퇴하거나 낙오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네트워크의 힘이죠.
을지로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바로
을지로 문화를 만드려는
이유에 있었습니다.
저도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 청년으로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않으면 기존의 사회 시스템에 갇혀 자신을 위한 결정을 수도 없이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물론 기존의 시스템에 속해 있다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시스템의 유일한 메리트였던 안정성이 더이상 보장되지 않는 데에 있죠. 우리는 거기에서 불안함을 느낌니다. 언젠가는 타의든 자의든 직장에서 나와 새로운 가계 수익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건 너무 명확한 사실입니다.을지로 청년들은 사회에서 낙오되어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번듯한 직장에서 자의로 나와 스스로를 시험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단순히 자기 혼자 잘 먹고 살자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 삶의 의미를 찾고 공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데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진심으로 응원을 보내고 싶네요.
지금 막 을지로를 지나왔는데
그래서인지, 여타의 길들처럼 확 눈에 띄거나 하지 않았군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들석해지면 뭔가 순간은 우쭐해지겠지만 곧 자본의 대공습이 시작되죠. 장사라는 게 어차피 단골 장사인데.. 천천히, 소문 안나게, 내밀하게 떠오르는 게 더 전략적일 듯.. 을지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큰 자본이 흘러 들어올까봐 조바심 내는 것 같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최대한 건물주들과 을지로 청년들, 그리고 서울시가 자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더라구요. 두고 봐야겠죠 :-)
을지로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라서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을지로에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공간들은 하나의 거리에 모여있지 않고,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오랜 시간동안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이 좀 더 협업하고 개별적인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이태원이나 삼청동을 접수한 누군가가 터를 잡은 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부디 젠트리피케이션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곳이 되길 바래봅니다.
안그래도 조금 찾아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다고 하더라구요. 뭔가 숨겨진 듯한 뉘앙스가 하나의 매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저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