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선이 없는 삶
조준선이 없는 삶
연상 남성들이 많은 모임에 어쩌다 끼게 됐는데, 이분들이 또 한 번 내게 당구를 가르쳐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다섯 번째쯤 겪은 일이다. 가장 최근 시도로부터도 십 수년은 된 일인 것 같다. 2004년 이후 처음인가?
2004년에는 상당히 친절하게 가르쳐줄 것 같은 형이 시도했는데(지금 북한산우동집 사장님이신 그분),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포기했다. 그후엔 내 인생에 난입해서 당구를 강요하는 남성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기능은 어려서 익히는 게 수월하지만, 나처럼 요령이 심하게 없는 경우는 좀 다르다. 어릴 때는 사람들이 가르치면서 뭘 요구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내 몸은 이 기능을 익힐 수 없을 것 같아서 쉬이 포기했다.
지금은 ‘내 몸은 이 기능을 익힐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가 안 쓰는 근육을 써서 아프기 때문이란 걸 이해하고, 쓰다보면 그 근육이 금방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망이 있다는 걸 알고 노력을 지속하는 게 가능하다. 군대에서 사격도 해보고 제반 스포츠에 대한 관람의 경험도 양적으로 축적됐기 때문에 도무지 못 알아들었던 말들도 이런 거겠거니 한다.
‘가르치는 남성성’에 대한 반감도 덜해졌다. 어릴 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아마 아버지가 너무 심하게 갈구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장애인 농담에 지금보다 훨씬 불쾌해했고, 가르치는 사람 몇 명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면 속으로 분개하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은 왜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른 얘기를 하는지 이해한다. 일단, 각자 폼이 다르다. 그러나 다르더라도 일관성이 없는 게 아니다. 수행해야 하는 기능 십 수개가 있고 그걸 수행하다가 생겨난 각자의 폼이다. 그래서 내가 기능 하나를 수행 못한다 싶으면 이렇게 수정하면 된다고 알려주는데 내가 못하는 기능이 한 두 개가 아니고 자기들 폼이 다 다르니 내게 접근해서 조언하는 내용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요령이 좋은 사람들은 이 과정을 길게 거치지 않고 자기 폼을 찾게 되겠지만 그게 안 되는 나같은 이들은 이러한 ‘지식’을 머릿속에 갖춘 이후에야 그들에게 짜증이 나지 않게 되었다.
힐난과 칭찬을 오가는 ‘남성적인 것을 잘하는 남성성’의 농담 방식에도 더 익숙해졌다. 불쾌해하기만 했던 그 농담들에 실은 찐한 남성연대가 숨어 있음을 나는 서른 넘어서 페미니스트의 도서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저 남성성을 싫어하고 혐오하기만 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것도 페미니스트들이 가르쳐 주었다. 물론 내게 깨달음을 줬던 이들은 요즘 유행에선 다 배척당할 사람들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남성은 ‘전통사회의 남자됨’을 포기하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망치질을 못해도 굶어죽지 않는다. 그러니 성격 여하에 따라선, 그 세상에 적응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세상을 개선하기보다는 개악하고 있다. 가부장문화와 전통적 남성성의 퇴조 이후의 다른 사회화 방식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 페미니스트들조차 혐오하는 ‘찌질한 남성’의 득세는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고, 내게 영향을 줬던 몇몇 사람의 생각이며, 사실 너무 범상한 통찰이라 '유행‘이 지나간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당연하게, 마치 다들 처음부터 알았던 사실인것마냥 받아질 거라고 본다.
나는 십대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소년을 만난다면 당구를 배우는 게 학교 공부 한 학기나 컴퓨터 게임 두서너개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게 될 것 같다. 전통사회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다섯살 쯤만 되어도 다들 도끼질은 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문자화된 지식을 익히는 것이 자기 삶에 더 도움이 된다.
현대 사회에선, 그렇지 않다. 요령이 없는 남성으로 태어나 당구조차 하지 않는다면 영영 알지 못할 몸의 감각들이 있다. 유튜브와 게임을 먼저 접하게 되는 세상에서 나처럼 ‘낙오한 남성’의 숫자는 점점 늘어날 것이고 나처럼 뭐가 있는지 뭐에서 낙오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세월을 허비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망치질보다는 지식활동을 빨리 대체할 것이기 때문에, 신체활동의 무능력은 삶의 경쟁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신체활동에서 조준선을 만들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각자의 폼은 다르지만, 간격을 없애고, 일직선으로 겨냥하고, 시네루를 주지 않고 공을 밀어서 수평인 벽에 부딪힌다면 내 큐대로 정확하게 다시 돌아올 공을 내가 쳐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늠하는 고개가 삐딱해지고, 팔은 불규칙하게 건들건들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사격에서도 똑같이 겪었던 일이다.
이는 내 인생에서 중고교시절 농구 슛폼까지는 익혔지만 레이업은 종시 하지 못했던 것 이상의 결정적인 벽이었다. 영점을 잡지 못하면 스윙도 할 수 없다. 무슨 종류의 스윙이 됐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스윙이 케틀벨 스윙 밖에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농구 슛폼처럼, 내 몸 한가운데에서 영점을 잡을 수 있는 동작 밖에 나는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격을 줄이고 수평 수직 일직선을 형성하는 정지자세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막대기를 들고 공을 다루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에서 내가 이룬 성취는 ‘뽀로쿠’일 수밖에 없었고 밑빠진 독처럼 영원히 수행능력이 쌓이지 않는 초심자의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굳이 막대기를 들지 않더라도, 펀치의 원리조차 이와 비슷할 것이다. 정지선을 형성하고 내질러야 한다. 거기에 허리를 돌리는 것을 결합시켜야 힘이 배가된다. 잠깐 이종격투기 도장에서 펀치와 킥을 따라해봤을 때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허리를 그렇게 돌려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야구 배트를 들고 서 있어도 나는 남들이 보기에 ‘가다가 안 나오는’ 상태일 수밖에 없었고, 다른 사람이 타석에 서면 스트라이크를 찔러 넣기 어려워하던 투수들도 내가 배트를 든 폼만 보고도 본능적인 확신을 가지고 가운데로 공을 뻥뻥 꽂아댔다.
그러니까 나는 ‘정립’의 의미를 신체로는 모르고 문자세계에서만 알았던 셈이다. 인류 발전단계에선 후자가 전자에 대한 유비에서 비롯되었을 텐데도 말이다. 모른다는 상태의 핵심은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잘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염색체 XY로 태어나 이 무지를 깨닫는데에 삼십 년을 넘는 시간을 허비했다. “괜찮아. 남자들은 금방 배워”라고 가르쳐주는 인간들이 말할 때 마음 속으로 ‘아, 나는 그렇지 않은 2%쪽이야’라고 되뇌이면서 말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조준선이 없는 삶을 그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