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거리로 나왔을까? - 거리로 나온 넷우익(야스다 고이치)을 읽고
그들은 왜 거리로 나왔을까?
- 거리로 나온 넷우익 (야스다 고이치)을 읽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를 재판관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파면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촛불이 승리했다.'라면서 환호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면서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파면 소식을 받아들였다. 바로 소위 말하는 태극기 집회 세력이었다. 그들은 박근혜에게 죄가 없으며, 탄핵은 무효라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태극기를 휘날렸지만, 촛불은 태극기 바람으로 꺼지지 않았고 더 타오르기만 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면서까지 잘못된 지배 체제를 되돌리려고 했던 이 세력의 외침은 탄핵으로 잦아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통령 박근혜가 피고인 박근혜가 되면서 그들은 순교자를 얻었으며, 박근혜의 적이었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공격할 지점이 더 분명해졌다. 이렇게 그들은 다시 중심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것은 박근혜 석방이 아니라 조롱뿐이었지만.
우리는 이들을 소수 세력이라고 무시하고, 무지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왜 극우적인 가치에 목숨을 거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하더라도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기로 치부하고는 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끝일까? 어찌 되었든 촛불 척결을 외치는 저 과격한 목소리도 한국 사회의 한목소리다. 무작정 외면하고 조롱할 수는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거리로 나왔는지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저런 못난 놈들'이라고 해서는 서로 간의 간격만 넓어질 뿐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물음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다. 한국에 태극기 세력이 있다면, 일본에는 재특회가 있다. 재특회란 '재일 특권을 반대하는 모임'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재일동포들이 부당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권으로 인해 일본인이 누릴 복지 혜택을 빼앗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실과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들이 거리연설을 하기 시작하면 피하기 바쁘지만, 야스다 고이치는 달랐다. '도대체 왜 이들은 이렇게 사는 걸까?' 그는 이 문제를 좀 더 파고 들어가기로 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혐한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이들을 보면 일상에서도 그런 과격한 언행을 할 것 같지만, 막상 일상에서는 그들도 평범하게 살아간다. 활동가나 운동가가 아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놀고 싶을 때 노는 사람들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심한 패배의식, 열등감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들의 원동력이다. 사회에서 그들은 어느 정도 낙오되어있다. 잘난 것이 별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어라? 자신보다 괜찮은 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재일 코리안(일본에는 한국 국적의 동포와 조선적이라고 하는 유사 국적을 가진 동포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을 포괄해 재일 코리안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도 이를 따른다)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지려고 한다. 그러던 찰나에 이렇게 규정하게 된다. '저들은 특권층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그 분노를 마구 발산한다. '춍(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은 죽어라!' 그러다가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분노를 퍼뜨리기 위해 인터넷에서 거리로 나선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의 세력을 만들고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은 여전히 일본인이라는, 일본에서 재일 코리안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마저 없으면 완전히 자존심이 박살 나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전체를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처절하게 재일 코리언들을 공격한다. 그들의 분노는 옳지만 방향이 잘못 되었다. 재일 코리안에게는 아무런 특권도 없으며 오히려 사회적 약자다. 그렇지만 표적을 명확히 한 그들에게 그런 사실은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적에게 폭력을 가한다. 대의를 위함이라지만 실상은 자신의 약함을 감추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분노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 강자에게 향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평소에 무시했던 그리고 만만하게 여겼던 약자에게로 향한다. 그러므로 일본 내부에서도 이들을 비웃지만, 숫자는 커지고 있다.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리다.
이런 사실은 일본 사회가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포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초에 사회가 잘 품어주었다면, 그들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열성적으로 자료를 찾아보지도, 거리로 나올 결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 재특회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이 극단주의를 받아들일 때까지 무엇을 했나?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방관했다. 재특회의 일방적인 혐오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 재일 코리안들의 아픔도 모두 그 사회 탓이다. 구성원에게 면죄부를 쥐여 줄 수는 없다는 소리다.
남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도 그렇다. 태극기 세력들은 과거의 기억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자존심을 지탱하는 마지노선이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거리에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직 그것들을 붙잡고 있는 그들의 절규를 이해하게 되면, 용납할 수는 없더라도, 꽤 슬프게 들린다. 그리고 일본의 사례와 같이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손이라도 한 번 제대로 건넨 적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필시 약자에 대한 혐오와 그를 통해 강력한 권한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런 시도들을 막아야 한다. 태극기 집회도 그렇다. 그러나 그러면서 동시에 저 너머에 있는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고, 다시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 해결은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부끄럽지만 나도 태극기 집회 부류 같은 혐오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이전에 왕따 등으로 인해 잃어간 자존심을 혐오로 얻으려고 했었다. 나는 그렇게 혐오로 얼룩진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혐오하지 않아도 내 자존심을 채울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분노해야 한다면 그 분노의 대상은 약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조금씩 변했고, 결국 내가 만든 세계를 스스로 붕괴시켜 밖으로 발걸음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태극기도, 재특회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손을 내밀다 보면 언젠가는 우울함과 혐오로 가득 찬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야스다 고이치가 말했듯이 그들도 결국 우리의 이웃인,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