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에 나눈 결혼과 사랑 이야기

in #muksteem6 years ago (edited)

어느 밤에 나눈 결혼과 사랑 이야기

스물아홉 8월, 전역 후 인천 집에 돌아온지는 거의 만 두 달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입대전 매년 해오던 고3 에세이 지도를 하면서, 스타트업 서비스 기획 등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생활을 할만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문돌이는 많이 건강해졌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마실 물을 갈아주고 털을 빗어준다. 가끔 파프리카도 주고 있다. 동생인 고등학생 희지에게는 간단히 영어 독해를 알려주기로 했다. 사실 내가 배우기 위해서이지만 밖에서 창업이다 의경이다해서 나도는 시간동안 그다지 잘 챙겨주기 못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다.(우린 살갑지 못하니 문희지 댓글 달지마셈. 에어포스 사줬잖아) 요즘은 밤이 늦어 아빠가 주무시면,(아직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이 익숙하지가 않음.) 엄마와 자주 대화를 나눈다.

우리의 대화는 상당히 의식의 흐름스러워서 끊이지 않고 화제가 마구 튀는데, 며칠 전에는 어쩌다(?) "왜 아빠와 결혼을 하게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 아들로서 내가 바라보는 아버지는 인생의 모든 스텟을 성실함에 찍은 자연인이다. 아무리 늦게 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시고, 딱히 살갑지도 모나지도 않은, 말이 많지 않은 우직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이 분은 사회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둘 야심이 없었다. 거창한 말을 전혀 안하는, 그냥 자기 자신의 자리를 산호처럼 고정하고는 30년째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어쩌면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보지 않으시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인생에서 두 번째네요.)


아빠는 10대때부터 자동차 정비를 했다. 그 때문인지 뭔가를 고치거나 만드는 것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아마도..중학교 2학년때 기술가정 시간때 배우는 '자동차 부품'에 대해서 궁금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 동네 아무 카센터에서 찍어온 아무 부품의 아무 사진을 보여드렸다. 아빠는 아무 부품의 뭐가 뭔지 다알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솔직히 좀 멋있네 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젊은 날의 모습은 지금의 내가 정말 많이 닮아있다. (즉 멋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엄마는 스물 두 살 때 스물 세 살의 아빠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서울에서 여상을 졸업한 엄마는 경리 일을 하고 있었고, 직장은 제법 큰 카도크가 있는 성수동에 있는 '공장'(그 당시엔 지칭할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이었다. 지금은 성수동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지만, 사실 성수동은 카센터와 수제화의 성지다. 조금만 골목을 들어가도 자동차 수리와 관련한 부품을 취급하는 '공장'들이 많이 나온다. 아빠는 내가 아는 한 살가운 말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직장 상사를 통해 엄마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래도 그 공장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었던 아빠를 엄마는 만나보기로 했다. 사실 경리였던 엄마는 회사에서 급여를 담당하고는 했는데,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가불'을 하거나 '지각'을 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나의 아빠는 한 해 동안 지각이 하나도 없고, 가불을 하나도 안받아서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엄마는 했고, 그래서 만났다고 한다.
                        

오래된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 이 '공장'인지는 모르겠다


엄마 아빠는 성수동이 아니라 세 정거장은 가야하는 인근 왕십리의 랜드마크 전풍호텔 앞에서 자주 만나고는 했다. 2013년 사업자를 내고 내가 처음으로 계약한 사무실은 왕십리에 있었고, 그 옆에는 K타워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왕십리 토박이들은 그 자리에 전풍호텔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회사 옥상에서 그 자리를 바라보며 (젊은 날이라기보다는)어린 날의 엄마 아빠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빠의 집은 심히 가난했다. 할아버지는 참전용사였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딱히 능력이 없었다. 아빠는 맞이같은 둘째였고, 동생들은 아래로 4명이 더 있었다. 아래로는 캐나다 고모부터 얼마전 뒤늦게 결혼한 막내삼촌까지. 아빠는 밥먹고 출퇴근에 쓰는 돈을 빼고는 전부다 집에 가져다 주었다. 엄빠가 2년쯤 만났을 때 어느날  나의 아빠는 나의 엄마에게 "내 월급을 전부다 너에게 주고 싶어"라고 말했고, 따로 프로모즈를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프로포즈였던 것 같다.고 며칠전 엄마는 말했다. 아빠는 그 다음달부터 집으로 보내는 돈을 절반으로 줄이고, 엄마에게 통장을 맡겼다.(?) 아빠 집에서는 당연히 싫어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우직한 스물다섯 남자는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시계를 봤다.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얼마전 추천받은 에릭 클랩튼의 Autumn Leaves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엄마는 어렸지만, 그래도 알았다고 한다. 아직 자신은 너무나 어리고 이 사람과의 결혼말고도 어쩌면 더 나은 다른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하다못해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 간 대학생이던 외삼촌의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맡긴 통장에 월급의 반을 채워넣으면서 함께 다시 2년을 보냈다. 엄마는 아빠에게 사실상 결혼을 승낙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는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정고시를 따는 것이었다. 격무인 힘든 정비공장일을 하며 두 가지를 다할 수는 없었기에 아빠는 먼저 정비기능사를 따기로 한다. 어느날 나의 엄마는 도시락을 싸들고 정비기능사 학원을 찾아갔다. 아빠의 학원동료(?)들은 엄마를 대단히 반갑게 맞이하며 "문00이 엄00양 자랑을 그렇게 많이해요~"라 놀리듯 말했다 한다. 엄마는 아빠의 의외의 살가운 면을 그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프로포즈를 월급통장 얘기로 하는 사람인걸..오죽하겠나.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책장에 앨범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어떤 지적 허영심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 가족들 중 사실은 내가 제일 똑똑해! 같은 오만같은 것이었다. 앨범을 찾아보다가, 나는 '수도학원'이라 적힌 낡은 노트를 발견했다. 글씨는 정갈한 신명조, 궁서체. 필기 내용은 목차에 맞춰 대단히 잘 정리된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제법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나는 이 노트를 쓴 사람이 공부를 제대로 했더라면 정말 잘했으리라 생각했다. 오만은 오만이었다. 나는 여전히 글씨를 잘 쓰지도, 노트 정리를 잘하지도 못한다. 시간이 훌쩍지나 작년 가을 저녁 나는 교통 의경 제복을 입고 신설동에 서있었다. 그 곳에는 빚바랜 글씨로 '수도학원'이라 적힌 학원이 있었다. 30년전 나의 아버지는 저 곳에 앉아있었을 것이다. 나의 엄마와 결혼하려고. 그 날 나는 한참동안 학원 간판을 바라봤다.

88년 엄마와 아빠는 예정대로 결혼했다. 그리고 88년 나의 형이 태어났다. 나의 형은 지금의 내 나이인 스물 아홉에 결혼했다. 형수는 스물 다섯이었다. 형수는 엄마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구하고자 엄마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 형은 등록금을 벌기위해 피자헛에서 4년간 알바를 했고, 그곳에서 형수를 만났다. 둘은 나의 엄마 아빠처럼 직장에서 만나 꼭 4년을 연애했고, 결혼을 한 해에 아들을 낳았다. 미약하고 위태롭지만 내 나이에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쿨함을 연기한다. 사실은 단 한번도 감정에서 쿨한 적이 없었는데도. 애써 괜찮은 척하고, 떠나는 이의 행복을 바라며 나도 나의 길을 가겠노라고 말한다. 입대하던 날에도 회사가 문닫던 날에도 그랬다. 또 얼마전에도 나는 울지않은 척 했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하고 싶어도 꾹꾹 참고는 한다. 그 말의 무게를 나는 참 크게 두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말은 나의 아버지의 "내 월급을 너에게 주고 싶어" 와 같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나는 배웠다' 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마지막 만남일지 알 수 없으므로" 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쩌면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낀 것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내 기억에 엄마에게는 3번, 아빠에게는 오늘 포함 글로만 두 번. 형에게는 5살때 형이 크게 다쳐 수술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한 번, 희지에게는 입대전날 (사실 펑펑 울면서) 쓴 편지에서 또 한 번.

이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처럼,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살 것이다. 30년 전 수도학원과 정비학원에서 공부하며 일한 그의 열정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 야심이 없는 그였지만 스물아홉의 그는 이미 사랑을 이뤘다. 또 여전히 사랑을 지키고 있다. 스물아홉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다. 일도 사랑도 얻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시골의 촌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게츠비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제 곧 스물 아홉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나의 수도학원이 될 것을 바라보며 길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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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담담하면서도 잔잔한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아버지가 이 글을 보신다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내색은 딱히 안 하실 것도 같지만. 앞으로의 스팀잇 활동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앞으로 꾸준히 제대로 써보려고 해요.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곁에 둘 수 있어야겠지요!

아 그리고..아버지께 보내드렸는데 답장이 없으시더라고요 ㅋㅋ 참 우직한 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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