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신랑/노자규

in #nojagyu6 years ago (edited)

우렁이 신랑
출처 : 노자규의 .. | 블로그
http://m.blog.naver.com/q5949a/221347652892
우렁이 신랑

수줍게 눈뜬 하늘이
사뿐히 저를 비쳐주던 날
당번인 저는
체육시간이라 빈 교실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뒷문이 열리면서 우유배달을 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책상 여기저기에
새하얀 유리병우유를 놓고
나가시는 겁니다

오늘은
몸져 누우신 아픈 엄마의 생신이라
새하얀 우유를 드리고 싶었지만
어린 저는 편지한 장만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도란도란 밥을 먹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적어 내려 간
편지를 가방에 넣고는
수돗가에 가야만 했습니다

배고픔을 발걸음에 매달고
집에 도착한 저는
가방을 열어 엄마에게
드릴 편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느낌이
손 끝에 닿았습니다
“유리병우유”

그날 이후
아침이 가면 밤이 오듯
학교 갔다 오면 편지함 속에
우유가 하나씩 들어가 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짝지 같은데 도무지 말을 안 하니
답답해진 저는
어느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먼 발취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노란 우산이 저만치서
저희 집을 행해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우편함을 열려고 할 때
“누구세요 “라는
저의 목소리가 골목 끝에서 울려 퍼지자
놀란 그 아이는 우산을 눌러 선채
왔던 길로 황급히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턴
우편함을 열어보는
작은 기쁨은 사라졌지만
빗속을 통통거리며
물방울 되어 뛰어가든 그 아이의
모습을 혼자 떠올리면서
웃곤 하는 예쁜 추억으론 남아있게 되었답니다

퐁당퐁당 계절이 오고 가더니
엄마의 생일 앞에 멈춰 섰습니다
일찍 집에 와 언니랑
분산스럽게 음식을 차려내고 있을때

“윤지야 학교 갔다 왔으면
도시락도 내놓으렴 “
엄마의 목소리에
얼렁 방으로 가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잡으려는 순간
오래전에 만져봤던 감촉이
손 끝에 느껴졌습니다
엄마의 생일날 또다시 나타난
“유리병 우유”

가슴에 청진기를 댄 것처럼
심쿵 거리는
시간들과 어여쁜 이별을 한지도
벌써 이십 년이 흐른 지금
싱긋한 미소한 점
얼굴에 올려놓는 추억으로 남겨준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우연한 행복에 힘인지
나무를 제일 사랑하는 봄처럼
지금 제 옆에 코를 골고 자고 있네요

아이들은 일요일이라
늘어지게 자는
지아빠를 깨운다고 야단이고요

“어떻게 부부가 되었냐고요 “

한날은 저에게
나무를 제일 사랑하는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누굴 것 같냐고 묻더라고요

“봄인가” 하며
머뭇거리는 저의 손을 잡고는

“봄은
나무에게 예쁜 잎을 입혀주니 좋고

“여름은
예쁜 꽃을 피게 하니 더 좋고

“가을은
예쁜 단풍옷도 입혀줘서 행복할 거고

“겨울은
힘든 나무들에게 휴식을 주니 편안할 거라며

난 너에게
봄여름 가을 겨울이 되어주고 싶어 “
라고 프러포즈를 하는 바람에.....

지금도 가끔
“당신 맞지,,,
그때 우유 넣어둔 사람이..”

“집 나간 우유였겠지”라며
싱긋이 웃기만 해요

근데 이 남자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친 것 같아요
몰래 넣어두는 습관 말이에요

자꾸 제 지갑에
돈이 떨어질만 하면
돈이 들어가 있고 하니 말이에요

“저 우렁이 신랑하고 사는 거 맞죠...”

노자규의 골목이야기18-08-28-15-34-16-119_deco.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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