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1.1. (3)-부끄러움
#1
당근이는 부끄러운 아이였다.
어쩌면 태어난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만 더 넣으려고 나를 낳았다.
아들이 아니었다.
엄마는 탯줄만 막 자른 당근이를 안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거기 나무 궤짝이 있었는데,
당근이를 궤짝에 넣은 다음 뚜껑을 닫았다.
나를 궤짝에서 꺼내 준 사람은 할매였다.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아니었지만
출산을 한 며느리 먹으라고 미역국을 끓여 왔는데
아기가 없더란다. 그래서
언나('아기'의 경상도 사투리) 어데 갔노... 묻는데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누워 있고.....
다락에서 뽀시락뽀시락 하는 소리가 들려
다락을 올라가 보니 궤짝에서 그 소리가 났다고....
할매가 뚜껑을 열어 보니
눈이 반들반들한 언나가 울지도 않고 궤짝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 언나가 바로 당근이였다.
출생의 비밀(?)이 드라마처럼
인생의 주요 전환기에 드라마틱하게 밝혀졌다면
내 부끄러움이 좀 덜했을까....
하지만, 대여섯 살 즈음,
울 할매와 사탕할매(동네 살머니)가 얘기하던 중
수많은 화제 가운데 하나로 그 날의 일이 공개된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들이 아니었던 관계로
당근이는 출생을 부정당하고,
아들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날의 일을 당연히 당근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할매의 그 몇마디 얘기는 당근이의 상상 속에서
점점 구체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당근이가 자아상을 만들어가던 사춘기 때
내 자아의 어두운 부분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근이가 여전히 밝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탕할매와 그날의 얘기를 하던 끝에
나더러 들으란 듯이 한 말 한마디 덕분이다.
태어날 때 천대받은 사람은 나중에 귀하게 된다.
대여섯 살, 아무것도 모르던 당근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이 말을 뇌리에 새겨넣은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태어날 때 엄마한테 버림받은 일은 큰 충격임에 틀림없었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할매의 말을 주술처럼 믿게 된 것이다.
그래야 살 수가 있었으니까...
#2
실존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든
기질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쪽이든
당근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여섯 살 즈음
엄마를 따라 고모네를 간 적이 있었다.
고모는 결혼한 아들과 같이 살고 있어서
고모네 집에 가면 내 조카벌 되는 고모의 손주들이
서넛 있었다.
고모는 엄마를 따라 온 나를 데리고
슈퍼에 가서 과자를 사 먹고 오라고 손주들에게 돈을 주었다.
슈퍼에는 과자며 빵, 사탕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조카벌 되는 아이들은 모두 하나씩 골라 들고 서서는
내가 뭔가 하나를 고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고를 수가, 아니
이미 내 눈엔 동그랗게 생긴 카스테라 빵이 들어와 있었는데
손을 뻗어 그것을 집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그 빵을 집어 들면, 그 아이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아서였다.
그 다음 장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한참동안 서너명의 조카벌 되는 아이들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빵과 눈싸움을 했던 것은, 마치 어제 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3
중학교 2학년 때였는지....
여전히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교대를 졸업한 둘째 언니가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학교로 발령받아서
아주아주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신발깔창 을 생리대로 쓴다는
가난한 여학생의 사연이 온 나라를 서글프게 했는데,
그때도 생리대를 넉넉하게 사서 쓸 수는 없었다.
월요일 아침, 둘째 언니에게 생리대 살 돈을 얻어서
등교길에 있는 가게에 들려 생리대를 하나 샀다.
아침 자습 시간에
같은 반 친구가 절박한 표정으로 내 자리로 왔다.
생리대를 하나만 달라고 했다.
그런 건 미리 준비해야지
그 친구는 공부를 못 했다.
그 친구는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 친구네 집은 우리집보다 가난한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나와 친하지 않았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무 개가 들어있는 생리대 봉지에서
단 한개를 꺼내 주지 않았다.
이날 이후 10년도 훨씬 더 지나서야, 나는 그 친구에게
정말 큰 잘못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리대 한 개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 친구의 외적인 면이어서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렇지만 그 친구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사과할 방법도 당연히 없었다.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그 친구는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정말 미안했어, YM아.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게....
#4
부끄러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는 바로
(자정이 지났으니)그저께의 일이다.
오전에 아들 일로 몹시 낙담한 일이 있었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모임이 있어서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집 앞 도로는 2차선이고, 모임장소로 가려면
우회전을 해서 4차선 도로를 타야 했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다니던 그 길이고,
한낮에는 차량 통행도 많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우회전을 했는데
직진해 오던 차와 그만 접촉사고가 나버렸다.
그 순간, 오전에 쌓였던 감정이 접촉사고로 인해
폭발했는지..... 사고 났을 때의 메뉴얼 따위 개나 줘버리고
상대편 운전자에게
왜, 내 차를, 보지 못 했냐며,
왜, 내 차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냐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상대편 운전자는, 아버지벌 되는 어르신이었고
그런 어르신들이 두 분이 더 타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불렀고, 상대편 운전자 어르신은 보험사에 연락했다.
남편이 왔고, 남편이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
나는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내 차를 보고 멈추지 않은 그쪽이 잘못했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보험사 직원이 왔고, 남편은 나에게 상황 설명을 하라고 한 뒤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쳤다.
남편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더 소리치고 싶었는지 차에 앉아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상황은 약 40분만에 종료되었다.
근처 마트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한 결과
내 과실이 크다고.....................
남편은 별 말 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억울했는데, 상대편 운전자가
아버지벌 되는 어르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노인들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병원에 드러누우면
어쩔 수 없이 다 물어내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겁도 났지만
무엇보다,
회복적 정의를 전파해야 한다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온갖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정작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상황에서는
악다구니만 쓴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 보기도 남편 보기도 너무 부끄러워서
무엇보다... 젊은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마음이 좋지 않을 그 어르신에게 부끄러워서
침대에 들어가
부끄러움에 요동치는 심장이 내뿜는 한숨만
푹푹 내질렀다.
아, 이 부끄러움을 어떡하느냐......
어떡하느냐......
어떡하느냐......
사실은 #4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고백합니다.
(진짜 고해성사를 해야 할 성당은 수 개월째 안 나가고 있으면서..... 휴.....ㅜㅜ)
아, 저는 그저께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알고 보면 동네 어르신일텐데, 공동체 회복을 위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공동체를 훼손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ㅜㅜ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ㅜㅜ
저는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아니고 보통의 인간이니
딱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졸라 볼까요?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ㅜㅜ
글쎄요... 모든 것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잊는다해도 머릿 속 깊숙히 숨어있고 상대방에게도 역시..
실체적으로는 용서가 의미가 없다 생각합니다.
그저 잘못했음을 무덤덤하게 인지하고 인정하고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거죠. 아예 다신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다음에는 중간에 깨닫고 미안하단 말로 사태의 악화를 줄일 수 있기를 비는 겁니다.
마음 잘 보듬어주시길 바랍니다.
위로와 조언 감사합니다. 꽤 오랫동안 마음을 잘 다스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주말 오후 잘 보내세요..
누구나 그럴 때 있잖아요? 부처님도 성자가 되기 전에는 부끄러움이 왜 없었겠어요.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해성사네요. 좋은 자양분이 되리라 믿고 응원합니다.
위로와 응원 감사합니다. 이 일을 자양분 삼아 조금 더 성숙해지길 바라며 애써야겠습니다. 주말 오후 평화롭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근님 안 다치셨어요?
무엇보다 위로해드리고 싶어요ㅠㅠ
다 괜찮아요
뭐 어때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있다고 하니 잘 살펴보시고 병원도 꼭 가보세요...
고마워요..ddllddll님..
후유증은 전혀 없고 못나빠진 저를 마주본다는 게 아픕니다.
주말 오후 잘 보내세요..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읽었네요
어쩜 이렇게 닮은꼴이죠
우리집도 아들 낳을려고 하다가 딸을 많이낳고 아들 1명이네요
어려서 푸대점을 많이 받았죠
지금은 딸이 많아서 대행이라 생각해요
교통 사고당하면 정신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어요
안 다치신것만 해도 다행이네요^^
옐로캣님 저희 집도 딸이 많아서 지금은 더 좋답니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말 오후 잘 보내세요. 고양이님들 소식 보러 놀러 갈게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부끄러움을 꺼낸 용기. 부끄러움을 숨기고 감추고 하지 않고 그것과 직면하고 넘어서는 순간 성장한다고 하잖아요. 충분히 반성하고 계시니 너무 자책하시지 마시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알아차리시면 되요~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다치지는 않으셨나요? 마음 잘 추스리시길 바라요 ㅠㅠ
고마워요 킴쑤님....
마음 속에 가시가 자라고 있는지, 마음이 산란하면 이렇게 불쑥 튀어나옵니다.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것에 치중해 있었는데, 가시를 없애거나 가시 끝을 둥글게 해야겠어요..
방법은...............모르겠지만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놀러 갈게요^^
출생의 비밀이나.. 생리대의 일이나.. 모두 생명에 관한 것이네요.. 친구가 생명에 관한 소중한 일을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날카로워졌을 수도.. 괜한 소리 해 봅니다. 그나 저나 '회복적 정의'는 언제 설파하실건지..
그냥 그땐 어리석어서...지금도 어리석어서....
회복적 정의는 저의 멘탈이 회복되거든....곧...
우헤헤헤헤
핑계가 한 사발이네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야죠~~
고맙습니다, 멀린님~
부끄럽지만 잘못했던 고백을 꺼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선하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잘 배운 경험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잘 하면 되겠죠? 누구나 그런 실수를 안 저지른 사람은 없을 듯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가즈앗!!! ㅋ
위로와 조언 감사합니다.. ^^
3월의 시작을 아름답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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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생기 넘치는 3월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