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철학] 촛불, 조국, 코로나19, 들뢰즈
근래에 벌어진 많은 사회적 사건들, 가령 촛불혁명, 트럼프 당선, 시진핑 중국, 아베 일본, 푸틴 러시아, 브렉시트, 조국사태, 코로나19사태 등을 꽤나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정치철학적, 욕망 정치적 이론은 들뢰즈&과타리에서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 들뢰즈&과타리의 한 페이지를 다시 읽는 이유이다.
"파시즘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미시정치적 혹은 분자적 권력이다. 그것은 군중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전체주의적 유기체라기보다 암적인 몸이다. 미국 영화는 종종 이 분자적 초점들을, 즉 패거리, 갱, 분파, 가족, 마을, 거리, 교통수단 등의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파시즘을 보여주었다. 욕망은 왜 자신의 탄압을 욕망할까?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탄압을 욕망할 수 있을까? 이런 전반적인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미시파시즘밖에 없다. 확실히 군중들은 수동적으로 권력에 굴복하는 게 아니다. 또한 군중들은 일종의 마조히즘적 히스테리에 빠져 억압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군중들은 이데올로기적 속임수에 기만당하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분자적 층위들을 필연적으로 지나가는 복합적 배치체들과 결코 뗄 수 없으며, 이미 자세, 태도, 지각, 예감, 기호계 등을 형성하고 있는 미시구성체들과 뗄 수 없다. 욕망은 결코 미분화(未分化)된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며, 욕망은 정교한 조립에서, 고도로 상호 작용하는 엔지니어링에서 결과한다. 요컨대, 유연한 절편성이 분자적 에너지들을 처리하고 궁극에는 욕망을 이미 파시즘적으로 규정한다. 좌파 조직들이 자신의 미시파시즘을 분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으로 분자 수준에서,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자신이 유지하고 배양하며 애지중지하는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 층위에서 반-파시스트이기란 참으로 쉽다." (들뢰즈& 과타리, 천 개의 고원, 원서 262쪽)
들뢰즈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파시즘과 미시파시즘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과 욕망의 관계 그리고 유연한 절편성과 욕망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