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아가씨'
아래에는 스토리 스포일러는 없지만, 장면 스포일러는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
21세기 세상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조시대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떠들어대고는 한잠 푹 자버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건데, 뭔가 한번 이야기하고 나면 여기저기에 말이 돌고 SNS 플랫폼마다 복제가 되어 한잠 푹 자버리고 나면 세상이 모두 알아버리게 되죠. 달에 사람이 안 살기에 망정이지 우주기지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다면 그곳까지도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보편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지만, 니체가 보편적 진리와 도덕이 삶을 병들게 한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목적의식 없이 진리와 도덕만을 강요받는 삶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더해줄 수 있겠죠. 그 이유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그곳에서 새롭고 다양한 인생을 접하며 간접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려 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박찬욱은 해당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서로 연관시키며 복수에 관한 기본 줄기 혹은 페미니즘에 관한 고갱이를 이야기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이야기는 모두 독립적이고 개성 있으며 단지 한 두 개의 핵심어로 정리한 후 교집합을 찾고 끝내기에는 디테일이 너무 풍부합니다.
'아가씨'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개성이 듬뿍 담겨 있는데요. 우선 아름다운 신들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맞장구를 쳐줄 것 같습니다. 아가씨가 책을 낭독하는 장면이라던지, 책이 가득한 서재라던지, 목을 매는 나무까지도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저는 '박쥐'도 무척 좋아했었는데, 김옥빈이 폭주했던 방이나 마지막 차 위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장면들은 아직도 가끔 기억이 납니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보는 즉시 해마에 저장되어 버리게 만드는 특유의 미장센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그 색채는 아무리 험블 한 설정의 장면이라도 바로 한 편의 회화작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반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살짝 뻔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라는 원작을 기반으로 해당 작품의 마지막 반전은 과감히 잘라버리고 이야기를 조금 더 단순화시키면서 미장센이나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려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참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들은 보통 소설 속 이야기들을 모두 풀어내려다가 디테일을 놓쳐 관객의 감성선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적절한 스토리만을 잘라내어 여유 있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사실 '아가씨'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반전이나 생각지 못했던 결말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죠. 이 작품은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는 동일한 시간대를 반복하며 서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거든요. 즉 영화의 초중반 부에서 이미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예측을 하기 쉬운 구조로, '아가씨'의 잔재미는 바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과 맞바꾼 이 구조적 특성을 잘 이용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동일한 시간대를 반복하면서 다른 시선에 의한 숨겨진 신이나 이야기들을 두 번째 파트에 계속 붙여나가면서 각 장면들을 완성시켜나갔고, 관객들은 두 번째나 세 번째 파트를 보면서 첫 번째 파트나 두 번째 파트에서 왜 상대방이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특히 이런 스토리 오버래핑 작업들은 아주 심혈을 기울여 작업되어져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남아있는 퍼즐을 기대하며 지속적으로 집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김민희는 개인적으로 '화차' 이후 주목하고 있는 배우인데요. 오래전 발연기의 아이콘에서 이렇게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주연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역시 노력과 연륜은 무시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특히 소설을 낭독하는 모습에서의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본어톤이나 감정표현은 최고였죠. 그런 면에 있어서 김태리는 더욱더 미래가 기대되는 연기자로, 김민희와 연기를 하는데 전혀 어색하거나 기울지 않더군요. 하정우, 조진웅 역시 시대상과 영화적 특성을 반영한 약간 오버스러운 연기가 잘 어울렸는데요. 하정우는 '추격자' 때 정말 연기력에 놀라 팬이 되었다가 '더 테러 라이브' 때 좀 주춤했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고 '터널'에 다시 한 번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잔인한 장면도 많고 어두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박찬욱표 영화만의 특징인 유머 코드들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목을 매는 것을 받치고 있다가 하정우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후 분해하며 팔을 푸는 바람에 아가씨 목이 졸리는 장면이라던지, 하정우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짜증 나는 표정으로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도 우습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약을 먹이러 하정우 방으로 와서 김민희가 친 왕비 톤의 대사가 베스트였습니다.
입맞춤을 허락하겠어요
였었죠? 물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하정우의 마지막 대사도 빼놓는다면 아쉬울 겁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1969년에 발표된 뚜아에무아라는 듀엣의 '임이 오는 소리'인데요. 이 영화를 위해 조정치가 편곡하고 가인과 민서가 함께 새롭게 레코딩을 했습니다. 잔잔하니 듣기 좋았던 이 곡은, 뚜아에무아의 곡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아 원곡 자체의 완성도도 꽤 높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전 작품들보다는 눈에 쏙 들어오는 구성에 결말 자체도 완벽한 해피앤딩이라 그만의 아이덴티티가 조금 희미해진 것은 아니냐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성이라는 건 모든 영화에서 동일한 냄새가 나게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보았는데요. 배드신이 조금 더 여성의 시선에 부드러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뭐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야한 장면은 김태리가 김민희의 이빨을 쇠골무로 갈아주는 장면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