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탑에 안내문이 없는 이유는?
현재 박물관 좌.우의 탑은 부처를 모신 상징물이 아니라, 박물관의 조형물 이외의 역활을 하지 못한다. 탑을 보며 사색을 하거나,최소한의 종교적 행위를 할수 있는 곳으로 조형미를 살려서 이전해야 한다.
나는 신과 종교의 긍정적인 역할을 지지한다. 고향마을 입구에 삼보사라 불리는 절이 있다. 손이 귀한 집에서 할아버지가 태어난 기쁨으로 증조할아버지가 시주한 절이다. 내이름은 할아버지가 스님께 부탁하여 지었다. 불교와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피로 먹고 살고있다. 또한 중등교육을 카톨릭계열 학교를 졸업해서 대구 계산성당에서 교리를 배웠다. 땡땡이 신자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와 배우자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난 진화론자이다.
탑의 부재를 전시해 놓음.
탑은 오랜시간을 함께하였다.
영남대학교 박물관 마당에 놓여진 석탑은 다른곳과 비교하여 큰 장점이 있다. 다른곳은 완성된 모습의 탑을 볼수있는데, 이곳에는 기단 면석 내부모습과 사리공의 모습은 다른곳에서 쉽게 볼수 없는것이다. 여러 시기에 제작된 탑의 여러 조각과 볼수없었던 내부의 모습을 볼수있는 것은 좋은 시도라 여겨진다. 신라와 고려 귀족이 자손만대의 영생을 위한 보시로 만들어질때, 신분을 뛰어넘어 많은 인민들이 믿었을 탑에는 많은 기원이 녹아 있을 것이다. 약탈과 전쟁이 일상이거나, 뼈빠지게 일해도 세금으로 뺏기면 보리고개를 넘기어려운 생활. 가난의 배고픔과 돌림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과 부모님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때가 근대이전에는 다반사였다. 사랑하는 청춘이 헤어짐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자식새끼 낳아 배부르게 먹이는 평화로운 세상은 얼마나 지켜 보았을까?
단내부를 알수있다.
탑이 움직인것은 70년대 이후이다.
조선초기 도성 한양에는 지붕위로 솟아오른 탑이200기가 넘는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였다. 중세의 역사의 분기점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후 조선시대 말기까지 고려의 중층건물들은 단층건물로 목조탑은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손으로 꼽을 만큼만 남았다. 이에 비해 불에 강한 석조와 벽돌형탑들은 처음제작한 그곳에서 세월을 지켜보고 서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탑은 그 자리를 지켜왔다.조선의 개국부터 불교탄압은 석탑을 파괴하였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진 않았다. 탑이 있던 자리는 불교의 전래이전부터, 신령스런 자리에 지어졌기에 사찰에서 향교로 그 의미가 바뀌었지만, 장소의 신성함은 변함이 없었다. 1500년을 자리를 지켜오던탑은 1970년대 이후 아파트, 산업공단,댐의 건설 대규모 토목.건설공사의 발굴에 밀려서 박물관 마당으로 탑이 이동하게 되었다. 경주박물관 마당의 탑은 보문호 건설당시 발굴조사 이전. 복원된것이 대표적이다. 박물관 마당에 놓여진 여러 석탑의 부재들은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을 벗어나, 지배하면서 제자리를 벗어난 탑이다
현재 사찰의 중심은 탑에서 법당으로 그 중심이 옮겨졌다. 하지만 옛날의 탑이 세워질때는 탑이 사찰의 중심이었다.탑속에 모셔진 사리가 부처를 상징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의 말씀과 기도를 겸하는 법당이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계급사회에서는 법당안은 귀족이나 양반등의 지배계급이 들어갈수 있는곳이었다. 피지배계급인 인민들, 특히 노비나 여자들은 탑을 보면서 부처님을 만나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현재 탑의 중요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 역활은 변함없다.
박물관 계단 좌우에 복원된 두개의 탑
복원된 벽돌형탑의 문제점.
영남대학교 발물관 계단에 복원된 두개의 탑은 1997년에 복원한 것으로 알고있다. 두개의 탑중에서 좌측의 석가탑과 비슷한 전형적인 삼층석탑(전형탑)에 맞추어 우측의 벽돌형식의 지붕이 있는 벽돌형탑(벽돌형탑)을 똑 같은 높이로 복원하였다. 전형탑은 원래의 석재의 없어진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내눈에는 보충재의 가공방법과 지대석의 높이에서 모자람이 있지만,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벽돌형탑은 원래의 석탑과 관련하여 제대로 복원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원형이 있는 석탑의 형태인지? 의문이 들며, 새로 보충한 석재의 비례가 어떤 탑을 기준으로 한것인지?아니면 전형탑에 높이에 맞추기 위해 비례를 조절하여 새로운 탑으로 변형한 것은 아닌지?
전형탑 정면
전형탑 배면
원형은 있었는가?
벽돌형탑의 첫번째 의심은 원형이 있었는가? 이다.
이탑은 모습은 다음과 같다. 지대석위에 직사각형의 커다란 돌덩어리8개가 2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따로 납작한 돌을 놓아 1층 몸돌을 받치는 모양이다.1층 몸돌에는 4면중에서 한쪽 면에 감실임을 보여주는 2짝문 형상을 새기고 좌우에서 인왕상이 지키고 있다.두 곳에 못 구멍이 남아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문고리를 부착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층,3층의 몸돌은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지붕받침돌은 위.아래면에 각각 층계가 있는 모습이다. 벽돌을 쌓아올린 형태를 단순화한 벽돌형석탑의 특징을 볼수 있다. 아랫면의 지붕받침은 각각 2단이며, 윗면의 낙수면은3단,2단,2단이다.상륜부의 노반석을 보충한 모습이다.
벽돌형탑 정면
벽돌형탑 배면
문화재나 비지정 문화재는 이전이나 복원 했을 경우 그 출처와 양식에 대한 안내문이 기본적인 필수사항이다. 원래있던 곳의 장소와 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탑은 박물관의 출입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안내문이 없다. 전형탑은 많은 곳에 분포하니 기록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원된 석탑은 벽돌형석탑이다.벽돌형 석탑중에서 장방형 8개의 돌을 2단으로 쌓아 기단을 구성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벽돌형탑 중에서 현재까지 경주지역에 3개만 존재한다.복원 당시에는 학계에 보고된것이 2개뿐이었다.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65호)과 경주 남산리 동 삼층석탑(보물124호)이다. 2000년에 복원한 경주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보물1935호)이다.지금까지 벽돌형석탑의 발견장소로 볼때,경주지역에서 원형이 있었다면, 발견된 지역의 장소와 시기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다. 또한 이 탑의 특징인 거대한 장방형의 석재는 옮기기가 어려워 탑신과 지붕돌이 한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남대학교의 유적지표조사 활동범위를 생각해 본다면 안동지방에서 발견된 석탑일 확률도 있다. 만약에 안동 근처라면 중요한 발견이다. 안동이 벽돌형석탑이 중점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고, 경주지역의 특징을 전파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동하리동모전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라 상상 해본다.
경주 남산리 동 삼층석탑(보물 124호)
복원 기준 석탑은?
두번째는 벽돌형탑의 비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복원할때까지 2개가 알려져 있다고 위에서 밝혔다. 남산리 동 삼층석탑과 서악리 삼층석탑중에서 어느것의 유형을 닮았는지 검토하면, 전체적인 비례의 기준을 삼을 수 있다. 한눈에 보았도 서악리 3층석탑이 기준 이었음 을 알 수있다. 많은 사람들이 남산리 동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알고 있다.남산리쌍탑은 경주남산을 대표하는 계곡인 화랑교육원-서출지-남산동 쌍탑-칠불암 을 연결하는 곳에 위치하여 접근이 편리하고, 전형탑과 벽돌형탑이 함께 쌍탑으로 건립되어 눈에 익혀진 곳으로 이 탑을 기준으로 복원했을 것이라 착각한다. 서악리 3층석탑은 무령왕릉 뒤쪽 서악산 구릉에 진흥왕과 여러 왕들의 무덤근처에 위치한다. 관람객이 많치않고, 쌍탑이 아니라 1탑이어서 박물관 벽돌형탑과 연계하기 힘들다.
서악리 삼층석탑과의 유사성은 1층 몸돌의 감실과 인왕상을 조각 하였다는 것과 몸돌을 받치는 납작한 돌이 1단으로 되어있는 특징이다. 남산동석탑은 3단이며, 감실과 인왕상이 없다. 지붕돌은 서악동은 지붕받침이 각각 동일한 5단이나, 남산은 지붕받침이 줄어든다. 박물관의 탑은 아래의 받침면은 동일하게 2단이며, 낙수면은 3단으로 되어있다.박물관탑과 서악동석탑은 1층 몸돌과 받침돌 기단 모습은 서로 닮은 모습이다. 인왕이 지키는 감실이 있는 방향의 기단의 석재의 물림이 상.하의 두단의 돌이 엇비슷하게 만나는 것 또한 동일한것으로 보아, 서악동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서악동 탑보다 높고 넓게 제작하였다.1층 지붕돌은 원래의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보충한 2,3층의 탑신은 가늘고 높게 제작하였다. 즉, 기단의 높이와 몸돌 2,3층은 높게하여 옆에있는 전형탑과 같은 높이로 맞추었다. 높게된 기단과 비율을 맞추기 위하여 폭을 넓혔다. 기단은 땅을 누르는 듯하게 넓고 높으나, 탑신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이다.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 65호) 남쪽 인왕상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65호) 남쪽방향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 65호)북쪽방향
전형석탑과 높이가 어떻게 같을수 있는가?
세번째 의심은 전형탑에 맞추어 높이를 조절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전통의 건축양식은 자연과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건축하는 것이었다. 탑 또한 그렇다. 경주 용장사지3층석탑이 대표적이다. 탑의 전래에서1탑에서 쌍탑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분화되었다. 쌍탑이 서로 다른 형태의 것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경주 남산동 삼층석탑이 대표적이다. 두곳의 탑은 형태와 높이가 각각 다르다. 불교경전의 해석을 통한 형상화 과정에서 높이가 다를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곳 박물관의 두개의 탑은 각각 출처도 불명확하면서,서로 다른 두개의 탑을 마주보며 배치하는것은 탑에 대한 기초가 부족한 것으로 볼수밖에 없다. 또한, 기단하부에서 상륜부의 높이가 똑 같다는 것은 기단석을 인위적으로 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인왕상을 조각된 면은 분황사 모전석탑이래 남쪽을 향하는 것이 기본이다. 보충석재의 가공방법도 문제가 있다.
좌. 우. 탑의 높이가 같다.
벽돌형탑은 박물관에서 왜곡한것이다.
그럼에도, 3가지 의문으로 벽돌형탑은 변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안내문을 만들지 않은 것은, 나의 의문을 복원당시에도 알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본다. 또한, 복원한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잘못된 복원으로 남아있는 것은 미술대학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연구진이 없다는 것으로 밖에 볼수없다.아니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질까봐 자기검열을 통해 모른척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박물관을 관람한 많은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대학교 박물관이 복원한 것이므로, 당연히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으로 이해하는 글들을 보게된다. 이대로 왜곡된 것을 두고 볼수는 없다. 나는 진보주의자이다. 정의당 당원으로 활동한다. 또한, 불합리한 결과나 낡은 생각과 고정관념의 굴레를 깨뜨리는 것이 생활속의 진보라 여긴다.
관람객이 스쳐지나 가는 계단참 주위에 세워진 부처를 모신 상징물이 아니라, 박물관의 조형물 역할만을 하고있다. 이제 탑을 보며 사색을 하거나,최소한의 종교적 행위(탑돌이)를 할수 있는 곳으로 조형미를 살려서 이전 하여야 한다.